파차파 캠프에서 노동 알선사로 큰 활약 [LA중앙일보] 04.22.18 10:42 핸포드서 활동하다가 리버사이드로 이주 LA로 다시 이주할 때까지 파차파서 살아 숙식제공하고 일도 많다고 노동자에 광고 정간 위기 맞은 신한민보 돕기에도 앞장서 매부와 동업해 대형 식료품점 운영하기도 수년간 노력해 한국 모친 미국행 꿈 이뤄 박충섭 박충섭에 대한 최초의 기사는 '공립신보' 1907년 5월 10일 '하변회 보고'다. '공립신보' 1907년 5월 ...
"아버지가 직접 재료 사서 코트 만들어줘" [LA중앙일보] 04.15.18 12:55 재봉틀 없어 밤새 손으로 작업해 완성가족들 이름으로 동족구호금 기부해슬하 5형제 모두 2차세계대전에 참전군입대는 조국 독립에 도움된다고 인식백신구 딸 백광선 리버사이드에서 출생한 백신구의 딸 백광선(Mary Paik Lee)은 '조용한 방랑 여행 : 미국의 한국인 여성 개척자(Quiet Odyssey : A Pioneer Korean Woman in America'(1...
북가주로 이주해 500에이커 벼농사 성공 [LA중앙일보] 04.08.18 15:57 농원의 부족한 일손 메꾸려 필리핀 노동자 고용한인들 벼농사 경험 많아 대규모 농장주 배출파차파 거주할 때 신한민보 사옥 건립에 거액 기부클레몬트 학생연구소 건축위원으로 왕성한 활동 백신구 가족 (1) 백신구는 1906년 하와이에서 리버사이드로 이주했고 1909년 4월에 리버사이드 지방회 신입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초기 파차파 캠프에서 활동했다. '신한민보'에서는 백...
대한인국민회 1918년부터 여성 입회 가능 [LA중앙일보] 04.01.18 11:16 차정석·정성 부부 슬하 자녀 없어차정성은 교회와 사회 위해 분투1944년 59세로 샌프란에서 별세사촌 차의석 자서전 '금산' 남겨차정성의 국민회 활동 1918년부터 여성의 대한인 국민회 입회가 허락되었는데, 차정성은 대한인 국민회원으로서 지속적으로 모금 운동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신한민보' 1931년 2월 5일 "국민회 제22회 창립기념일에 대성황...
신한민보 논설 통해 대한독립의 중요성 강조 [LA중앙일보] 03.25.18 12:25 차정석과 지방회차정석의 남자 형제는 차원석 차광석 차리석이 있다. 이들은 친형제이거나 같은 항렬의 사촌 형제다. 차원석은 한국에 있었고 차광석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신학 공부를 위해 왔다. 차리석은 중국에서 활동했다. 여자 형제는 차락희 차보석이 있다. 한편 차정석과 차의석은 같은 항렬의 사촌 관계다. 차정석의 활동 차정석은 리버사이드에서 1907년에서 19013년까지...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김순학은 지방회서 헌신하다 마차 사고로 별세 [LA중앙일보] 03.18.18 15:42 말이 뛰쳐나가 마차서 떨어져 숨져같이탔던 박충섭 가족은 중상당해장례식에 한인·미국인 50여명 참석친구 밀러는 문상객들 호텔로 초청아들 김태선은 암으로 28세 사망동포들 애절한 심정으로 죽음 애도 ◆김순학의 죽음 김순학은 리버사이드 지방회관이 파차파 애비뉴에서 바인 스트리트로 이동했던 1918년 말에 대의원으로 선정되었다. 리버사이드 지방회가 쇠퇴하던 무렵에도 김순학은 ...
리버사이드 공원묘지서 '김순학'의 묘지 발견 [LA중앙일보] 03.11.18 15:49 1911년 지방회 회장으로 피선돼 활동자치 규칙 17조 마련해서 질서 잡기도동포들의 행복 증진이 목적이라고 명시중가주서 맹정희 등과 합동 농원 경영130에이커 토지에 벼농사 시작하기도국치기념 행사에서 기도와 기념사 담당◆김순학과 김태선(1) 이선주는 리버사이드 근처의 올리브우드와 에버그린 묘지에서 한인으로 추정되는 4개의 묘를 발견했지만 그들이 한인이라는 증거는 찾지 ...
일곱 자녀 육아로 곤경…동포에 구제금 요청 [LA중앙일보] 03.04.18 16:07 전낙청 '구제적 강도' 등 소설 지어넷째 오미스는 수학 잘해 캘텍 진학◆전낙청의 경제적 어려움 전낙청은 1918년에 아들을 보았다. '신한민보' 1918년 3월 7일자는 "국민 신적. 리버사이드 전낙청. 2월 5일 생남"이라고 보도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전경상이다. 전낙청은 아들을 보았지만 부인은 1919년에 병으로 고생하다가 유리와 망치로 스스로 몸을 해하였...
인종차별 심한 SF 떠나 리버사이드로 이주 [LA중앙일보] 02.25.18 16:58 한인 24가구 거주…남자 62명, 여자 39명타 지역과는 달리 가족 중심 공동체 형성전낙청의 조카 전경무는 특파원으로 활동1945년 귀국해 올림픽대책 부위원장 역임 파차파 캠프 한인들 파차파 캠프가 미국 최초 그리고 최대의 한인 타운이었다는 것이 새로운 연구로 밝혀졌다. 특히 파차파 캠프는 타 지역과는 달리 가족 중심의 공동체가 형성됐다는 특징이 있다. 젊은 총각 중심...
동포 자본 결집해 도산과 함께 회사 창업 [LA중앙일보] 02.18.18 17:14 김인수-김용련-김삼손 3대 거주같은 초등 다니고 같은 묘지 묻혀 집 비운 도산 위해 가족에 큰 도움나중에 중가주 델라노서 농장 운영 김인수 가족김인수는 안창호 부인 안혜련(이혜련)의 외오촌숙(성이 다른 일가 가운데 아저씨뻘 되는 사람)으로 리버사이드 지방회에서 활동하며 파차파 캠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오래 거주했다. 1905년...
미국서 강제 추방된 도산은 가족도 못 보고… [LA중앙일보] 02.11.18 15:08 사회주의자로 오인 받아 고초 겪기도도산의 유복자는 아버지 얼굴도 몰라파차파는 미주에 세워진 첫 코리아타운농사 불황 탓으로 다뉴바 등으로 떠나2016년 리버사이드 시의회 조례안 확정'문화관심지'로 지정해 역사적 의미 부여 ◆안창호 생애 마감 도산 안창호는 1932년 가족이 있는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윤봉길 의사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거사사건(1932년 4월 29...
이상촌 건설 위해 필리핀 방문에 나선 도산 [LA중앙일보] 02.04.18 14:04 하와이 체류 불허로 6시간 만에 떠나부인 이혜련 여사와는 마지막 작별미국 이민국과 달리 호주는 편견 없어상해서도 한인들의 열렬한 환영 받아 마지막 이별 샌프란시스코 엔젤 섬 1926년 2월 23일자 이민국 문서 (12025/14120) 역시 "중국인 도산 안창호가 소노마호에 승선한 것을 사진과 함께 확인했다"고 쓰고 있다. 또한 같은 문서 밑에 "1926년 2월 23...
"요주의 인물로 찍힌 도산은 이민국 감시 받아" [LA중앙일보] 01.28.18 16:00 대질 심문 받았지만 체류 연장 허락최종 판단 하지 않고 출국까지 파악귀국선 소노마호 기관고장으로 회항환송행사 후 샌프란시스코 출발 맞아 1925년 7월22일 샌프란시스코 앤젤 섬 이민국 문서는 안창호에게 체류 연장이 허가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1925년 8월16일부터 6개월간 체류가 연장되어 즉 1926년 2월16일까지 합법적 체류가 가능해진 것이다. 안창호는 19...
이민국 투서 탓에 가족 두고 도산 강제 추방 당해 [LA중앙일보] 01.21.18 14:46 안창호 감시와 수사 1924년 12월 24일자 앤젤 섬 이민국 자료(23880/1-6)에 의하면 "도산 안창호 가족 관계를 확인하고 그가 미국에 입국한 목적이 무엇이며 얼마 동안 체류할 예정인지를 직접 확인하라"는 내용이다. 이 문서에서는 콩 왕과 찰스 홍 이 이름으로 이민국에 제출된 투서로 조사가 시작됐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즉, 미국 이민국은 안창호를 모함하는 ...
도산 온갖 모함 불구 "내게 적은 없다" [LA중앙일보] 01.15.18 13:28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 도산을 볼셰비스트, 즉 공산주의자로 모함한 투서가 동지회 소행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나 간접적 또는 정황적 증거는 여러 곳에서 나온다. 김산은 도산 안창호가 1924년에 LA집에 공산주의 서적이 있다는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다고 했다. 또한 곽림대는 1924년 뉴욕의 조그만 가게에서 우연히 서재필을 만났는데 그때 나눈 대화를 기억하고 ...
이민국 모함 투서로 도산은 끝내 추방당해 [LA중앙일보] 01.07.18 12:08 도산 안창호 추방 (1924~1926) 도산 안창호는 모두 3차례 미국에서 거주했다. 첫번째는 1902년부터 1907년까지다. 즉 샌프란시스코에서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파차파 캠프 또는 도산 공화국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한 시기이다. 두 번째는 1911년부터 1919년까지로,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활동을 활발히 전개한 시기다. 마지막은 1924년부터 1926년까지로, 미...
한파로 오렌지 농장 위축…한인촌 인구 감소 [LA중앙일보] 01.01.18 13:29 리버사이드 지방회 재정적 어려움 커져신한민보에 회관 폐지 보도까지 게재돼지방회가 바인 도로로 이주 결정하면서파차파는 더 이상 한인촌 역할 못하게돼 '신한민보'는 1912년 6월 17일에 "하변동의 사업. 리버사이드에 있는 동포 정동심.조갑석 양 씨는 사업에 착수하여 웨스트 리버사이드에 밭 15에이커를 6년 계약으로 세득하여 1년 감과 딸기 등의 채소 농원을 경영하기로 ...
중앙총회 부회장 폭행해 대의원직 박탈돼 [LA중앙일보] 12.24.17 12:07 박용만씨 구타한 오진국씨하와이 가던 중 사고로 사망 한인 학생 양성소도 설립타지역 독지가 학비 지원▶정등렵 정등렵에 관한 기록은 1906년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공립신보' 1906년 6월 30일자에 기사에 "양씨권학. 회원 위영민, 정등렵 양씨가 학원에 들어가서 곤란을 참고 학업에 근실한 고로 총회에서 열성으로 공부하는 것을 치하하고 예물을 보내는데 차등 학생과 ...
열악한 노동자들로 생활하며 공동체 지켜 [LA중앙일보] 12.17.17 16:18 도산 안창호 리더십으로처음부터 엄격한 규율로질서있는 자율공동체 이뤄 파차파 캠프 한인들은 주로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느 농장에서 일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다만 코넬리어스 럼지 소유의 알타 비스타 농장에서 안창호와 한인들이 일을 했고 전낙청의 경우 운이 좋아 리버사이드 서쪽의 글렌 아이본 지역에서 한 치과의사 소유의 농...
"지방회 임시회장 김순학씨 마차사고로 별세" [LA중앙일보] 12.10.17 11:47 한인타운 리더로 활약…신문에 보도장남 김태선씨 28세에 암으로 사망해아버지와 같은 에버그린 묘지에 안장 이선주는 리버사이드 근처의 올리브 우드와 에버그린 묘지에서 한인으로 추정되는 4개의 묘를 발견했지만 그들이 한인이라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같은 묘지에 있는 '김 순(Soon Kim)'은 1919년 2월 25일이라는 사망일자만 적혀 있고, 또 한 ...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판잣집 마루는 쪼개져도 고칠 엄두도 못내" [LA중앙일보] 12.03.17 13:53 1910년 센서스엔 24가구 100명 거주코트 살 돈 없어 밤새 손으로 만들기도 이주해온 이유는 대부분 직장 구하려 #파차파 캠프의 한인들 한인 역사 저술가 이선주는 "191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리버사이드에 살고 있던 한인 수는 65~70명가량이었다. 그러나 실제 숫자는 2배가 넘을 만큼 더 많았다"고 밝히고 있다. 필자가 1910년 미국 인구 센서스 통계에서 ...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애국자처럼 행동하라! 너희가 한국 대표다" [LA중앙일보] 11.26.17 14:38 ◆한국어 학교 차의석은 자신의 자서전 '금산'에서 자신이 리버사이드에 도착한 첫 날 저녁 파차파 캠프에 영어를 가르치러 온 선생님들을 보았다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532 파차파 애비뉴의 중심에 있는 빨간 빌딩 안에서 영어 공부를 했다. 나는 아직도 영어 선생님들의 이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금발의 젊은 미녀 미스 화이트, 미스터 어바인과 미시즈 어바인, 어...
1905년 한인 3명이 최초로 리버사이드교회 등록 [LA중앙일보] 11.19.17 11:58 첫 신자들 대부분 원래 기독교인평양 출신 대다수 평양교회 다녀 한국어 유창한 마페트 목사가 미주에서 첫 한국어 설교 제공◆한인 장로 선교회 도산은 기독교인으로서 민주주의 절차에 따른 공동체를 파차파 캠프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한인들은 리버사이드에 도착한 직후 리버사이드 장로교회 소속으로 한인 장로 선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를 드렸고 동시에 성경 공부와 영어 공부도 함께...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일본인으로 오해받아 한인노동자 추방되기도 [LA중앙일보] 11.12.17 15:53 헤밋사건 계기로 한인 법적지위 확보국무부 "한인은 일본 식민 국민 아님"일본 간섭없이 독립운동하게 된 계기대한인국민회 위상 높인 역사적 사건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도산 안창호가 1907년부터 한국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동안 미주 지역의 대한인국민회 활동은 지도자 부재로 상대적으로 위축된 상태였다. 1911년 9월 도산 안창호가 뉴욕에 도착한 후 샌프란시스...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안중근 의거 후 망명객들 파차파로 이주 [LA중앙일보] 11.05.17 15:17 단독범 주장에 지도자들 풀려나한국 탈출 학생들 리버사이드로 한일합방 규탄 '망국일' 행사 가져1918년부터 여성들도 회원 자격독립 운동의 메카로 파차파 캠프는 초기 미주 한인 사회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물론 공립협회와 대한인국민회 본부는 샌프란시스코에 설립되었으나 이 두 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회원 중 상당수는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거주하고 있던 ...
민주 절차 중시하고 자체 운영기구도 설립 [LA중앙일보] 10.29.17 11:39 계절 노동자 빼도 200여 명 거주타지역 갔다와도 일자리 구해줘1913년 한파로 오렌지 타격 입어농장 닫아 일자리 없어져 LA이주 안창호는 파차파 캠프를 민주주의 한인 공동체로 생각하고 있었다. 도산 안창호는 자녀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민주주의 교육을 시켰다. '팀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야구 규정으로부터 지도를 시작...
한인 노동국 설립해 취업 알선에 나서 [LA중앙일보] 10.22.17 16:36 한인노동자 오렌지 농장에 소개리버사이드 이주자 늘리는 계기파차파 캠프 주소지 3번 바뀌어20개의 목조 건물로 열악한 환경◆파차파 캠프의 정확한 위치 1904년 도산 안창호가 리버사이드로 이주하면서 그의 리더십으로 한인타운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곳이 바로 파차파 애비뉴(Pachappa Avenue)이다. 한인 집단 거주 지역이었던 리버사이드 한인타운을 사람들은 '파차파...
"농장주가 보든 안 보든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LA중앙일보] 10.15.17 11:05 도산, 파차파 주민들에게정직과 근면의 중요성 강조1910센서스에 100여명 거주교회 주일학교만 50명 다녀도산 안창호와 부인 이혜련 여사는 이스트 오클랜드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약 1년 6개월 동안 거주하면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극심한 반아시안 정서와 노골적인 인종 차별 때문에 아시안들은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가 힘들었고 경제적으로 생...
도산 신문 인터뷰서 "동포 도우려 교사 되겠다" [LA중앙일보] 10.08.17 11:41 1902년 도산 부부 샌프란시스코 도착한인 드물어 'SF크로니클' 기자 만나빈털터리 상태서 선교사 도움으로 연명기회 찾아 남가주 리버사이드로 내려와도산 안창호는 1902년 10월14일 부인 이혜련 여사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결혼 직후 4개월 만에 일종의 신혼여행 비슷하게 미국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도산 안창호의 미국 입국 경로와 샌프란시스코 도착...
[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하와이·SF에 없는 미 첫 한인타운 형성 [LA중앙일보] 10.01.17 17:17 한 곳 집단 거주하며 공동체 형성직업소개소 통해 취업 기회 제공미혼 남성 중심이 아닌 가족 중심학교 세워 정체성 교육도 중요시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의 초석을 다진 곳이 바로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이다. 도산 안창호는 1903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친목회를 리버사이드 한인들을 중심으로 공립협회로 발전시켰다. 또한 1906년에는 도산 안창호와 지인들이 리...
[창간시리즈] 최초 한인촌 '파차파 캠프'…한인사회 구심점, 한인 독립운동 메카 [LA중앙일보] 09.24.17 18:44 중앙일보가 창간 43주년을 맞아 미국 최초의 한인촌 파차파 캠프와 새로 발굴된 도산 안창호의 삶을 조명하는 기획시리즈를 시작합니다.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캠프는 안창호와 공립협회에 의해 설립된 미국 최고의 한인 공동체입니다. 다른 지역 한인 캠프와는 달리 가족 중심의 공동체가 형성됐던 초기이민사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파차파 캠프는 한인사회의 구심점이 되어 한인들의 ...
파차파 캠프는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메카' [LA중앙일보] 09.24.17 11:22 도산 주도로 한인 노동자 이주시켜 형성정착에 필요한 직업과 이민정보 등 제공안창호의 초기 파차파 활동 새로 밝혀져▶들어가는 말 도산 안창호는 이승만, 박용만, 서재필 등과 함께 초기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친목회, 공립협회, 대한인국민회, 흥사단 등을 조직하고 미국, 중국, 멕시코, 러시아, 다른 여러 국가들을 순방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