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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人] 발레리나로 돌아온 아이돌 스타 김보경씨

"꿈은 눈물도 멎게 했고, 우울증도 날렸어요"

10년간 발레리나 활동하다 걸 그룹 '천상지희' 멤버로…일본 공연 앞두고 부상 당해
2년간 눈물겨운 재활 성공…최근 LA발레단 오디션 합격…접었던 가수의 꿈 다시 노크


허리가 끊어질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몸을 지탱하기조차 힘든 고통이다. 땀범벅이 되어 차가운 연습실 바닥에 그대로 쓰러진다. 팬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멀어지는 환청이 들린다. 이내 의식이 사라진다.

 2008년 겨울 일본 도쿄 인근의 한 연습실. 일본에 진출해 대형 콘서트를 앞두고 연습에 몰두하던 4인조 여성그룹의 한 멤버가 허리 부상을 당했다. 모든 활동이 중단됐다. 손에 잡힐 듯하던 아시아 시장 진출의 꿈은 한 순간 무너졌다. 처음 맛본 좌절은 허리의 통증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전부라고 믿었던 춤을 출 수 없어 매일 울었다. 고심 끝에 결국 가족이 있는 미국행을 택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조금씩 안정을 찾았고 2년여의 시간을 재활에 매달렸다. 시련을 이겨낸 인내의 열매는 달콤했다. 지난달 LA발레단에서 진행한 공개 오디션에서 수백대일의 경쟁률을 뚫고 한인으로는 유일하게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SM엔터테인먼트의 4인조 여성그룹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의 멤버 '천무 스테파니(23.한국명 김보경)'가 그녀다.



◇발레를 사랑한 소녀

김씨는 5살 때 처음 발레화를 신었다. 이후 16세 때 SM엔터테인먼트에 발탁되기 전까지 10여년 동안 발레화는 김씨의 분신이 됐다. 어린 시절에는 막연하게 춤 추는 것이 좋았다.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춤추는 모습을 보고 따라하기도 하고 혼자 연습까지 할 정도로 춤추는 것을 좋아하다 발레를 만나게 됐다. 발레가 운명처럼 다가온 순간이었다.

지난 1999년 가족을 따라 남가주 샌디에이고로 이민 온 그는 체계적인 발레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샌디에이고 지역 블랙마운틴 무용센터에서 은사를 만나 차근차근 실력을 쌓았다. 좋아하는 발레를 통해 마음껏 끼를 발산했고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12살때는 세계예능교류협회가 주최한 발레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냈고 남가주 청소년 발레단에서 솔리스트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냥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었고 그것을 계속 하기위해 최선을 다 했다. 무대에 서 있는 것이 행복했다"고 말한다.

그의 발레 실력은 주류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지난 2000년대 초반 한 여름밤의 꿈 호두까기 인형 코펠리아 미녀와 야수 등에 주연으로 출연한 김씨는 샌디에이고 유니온 트리뷴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또한 2003년에는 보스턴 발레단 산하 발레스쿨에 스카우트 될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는 이러한 재능이 '유전자'라고 말하는 당찬 신세대다. 김씨는 "(발레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이) 성악을 전공한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라며 "음악이나 무용에 관심이 많고 조예가 깊은 어머니 덕에 어릴때부터 자연스럽게 음악과 무용을 접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주신 재능에 감사하고 즐기면서 연습하고 무대에 섰던 것이 더 좋은 기회로 이어졌다"고 했다.

◇발레리나에서 아이돌로

발레 유망주였던 그의 진로는 한 순간에 바뀌었다. 2004년 SM엔터테인먼트가 오렌지카운티 지역에서 진행한 청소년 베스트 선발대회에서 노래짱 대상을 받으면서 부터다. 당시 샌디에이고 랜초 버나도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김씨는 "우연한 기회에 선발대회에 출전했는데 덜컥 상까지 받으며 한국에서 가수 활동 제의를 받게 됐다"며 "발레와 가수의 갈림길에서 고민을 하다 모국에서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발레리나의 꿈을 잠시 접었다. 만약 지금이라도 당시와 같은 갈림길에 서 있다면 주저없이 가수의 길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타고난 가창력과 춤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한국에서도 승승장구 했다. 불과 1년여의 짧은 연습생 생활을 거쳐 바로 가수로 데뷔할 수 있었다. SM이 아시아 시장을 겨냥해 야심차게 기획해 선보인 여성 4인조 그룹 '천상지희'의 멤버로 당당히 발탁된 것. 팀에서 안무를 담당한 그에게는 '천무 스테파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영어 이름인 스테파니와 하늘의 춤이라는 뜻의 천무가 합쳐진 말이다.

당시 멤버들 중 유일하게 한국 연예계 경험이 없었던 그는 "한국에서의 생활은 모든 것이 새로웠다. 그렇지만 발레를 전공한 덕에 떨지도 긴장하지도 않았었다"며 "무대 체질이었다. 한국에서의 경험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라고 했다.

김씨는 데뷔 후 각종 오락프로그램에서 직접 안무를 짠 화려한 무대를 선보이며 단숨에 연예계 블루칩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자연스레 팬층도 두꺼워졌고 목표로 했던 아시아 시장 진출에도 성공했다.

◇부상 재활 그리고 발레

일본에 진출한 천상지희는 수 차례 콘서트를 열며 인지도를 높여 나갔다. 인기가 높아지면서 첫 단독 콘서트 일정이 잡혔다. 김씨는 "일본에서 3년 동안 생활하며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자리를 잡아나가고 있던 중 단독 콘서트가 계획됐었다"며 "멤버들 모두 의욕이 넘쳤다. 노력의 결실이 맺어진다는 생각에 자는 시간도 아끼며 연습에 집중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나친 의욕은 화를 부른 걸까. 과도한 연습으로 인해 허리에 무리가 온 것.

"어릴 때부터 운동을 해서 원래 허리가 좋지 않았던 상황에서 격렬한 춤 연습이 계속되자 부상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숙소에서 휴식을 취했지만 나아지지 않았어요. 결국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에서의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허리 통증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했던 그는 수 개월 동안 집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춤은 커녕 거동조차 할 수 없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한 그를 다시 일으켜세운 건 '발레'였다.

"몸을 움직이기 위해 치료를 받고 재활 훈련에 들어간 뒤 어릴 때 다녔던 발레 학교를 다시 찾았어요. 학교를 떠난지 수 년이 지났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였어요."

은사의 권유로 김씨는 다시 발레화를 신었다. 몸이 아프면 지도자의 길을 가라는 조언에 따라 지도자 자격증도 땄다. "발레를 다시 시작하자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발레와 재활을 병행했습니다. 결국 2년여에 걸친 재활도 잘 마무리됐고 다시 춤을 출 수 있게 됐습니다."

몸이 좋아지면서 자신감도 생겼다. 체계적인 무용 공부를 위해 지난해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과에 지원해 늦깎이 대학생이 되는 기쁨도 맛봤다. 휴학을 하고 다시 미국에 온 그는 LA발레단에서 진행한 '호두까기 인형' 공개 오디션에 응시해 유일한 한인 발레 단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어떤 배역을 맡아도 최선을 다하는 발레리나가 될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무대 위에서 그 동안 응원해주신 많은 분들에게 보답하겠습니다. 연말 공연을 마치고 내년쯤에는 다시 가수로 복귀해 잠시 멈췄던 꿈을 향해 새로운 도전을 할 것입니다."

장래 발레 지도자가 꿈이라는 그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한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싶어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봐 주세요"라고 응원을 당부했다.

만난사람= 곽재민 기자 jmkwak@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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