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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 뉴스] 바나나 껍질을 밟고 있는 남자

김석하/사회부 부국장

길을 잃는다는 것은 남자에게 자존심의 큰 상처다.

연말연시 지인방문.여행.쇼핑 등으로 가족 나들이가 많은 때다. 보통 아버지가 운전대를 잡는다. 목적지까지 한번에 도착하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 '남자 운전자'가 길을 헤매게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차 안 공기는 순간 싸늘해진다. 말이 없어지고 운전은 거칠어진다. 갔던 거리를 또 지나치고 목적지 주변을 뱅뱅 돌면서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 진다. 옆 자리 아내가 "그냥 물어봐" 하면 벌컥 화를 낸다.

길 찾기는 이제 승부다. '사투' 끝에 길을 찾은 남자는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기세가 당당하다. 하지만 주유소나 편의점에 물어본 뒤 길을 찾은 남자는 '주소가 이상하게 돼 있다'는 둥 연신 구시렁댄다. 여자가 볼 때 한심하다.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미로같은 세상에서 남자는 자신이 내비게이션이길 바란다. 목적지를 정확히 알고 최단거리로 그 곳에 도달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하지만 내비게이션 기능의 생명은 사실 소프트웨어에 깔려있는 전자지도다. 단말기는 최단거리만 표시하지 도로의 상태를 알려주지 않는다. 업데이트되지 않은 지도는 가는 길이 홍수나 폭설로 폐쇄돼 있는지를 표시하지 않는다. 결국 단말기만 보는 남자 운전자는 조난당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 주에 발생했던 총격 살해-자살 사건을 포함해 40대 후반~ 50대 이민자 한인남성들이 저지르는 크고 작은 문제는 조난을 당했기 때문이다. 길을 잃은 순간 누군가에게 제대로 가야할 길을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변만 빙빙 돌다가 화만 키우고 극단적으로 폭발한 것이다.

중년 남자의 마음은 복잡하다. 그 나이쯤 되면 사춘기에 이어 일생에서 가장 큰 생리적.심리적 변화를 겪는다. 게다가 밖으로는 경제적 불안이 닥치고 안으로는 가정에서 위상이 흔들린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하소연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술 먹고 떠들고 건강 챙긴다며 운동을 하고 가족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며 불안감과 초조감을 슬쩍 감출 뿐이다.

옛날 같으면 잘하나 못하나 '아버지'로서 권위가 확실하게 자리했지만 지금은 '아빠시대'다. 아이들에겐 친구같이 허물없이 놀아줘야 하고 아내에겐 집안 일을 함께 하는 동료같은 존재가 돼야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아버지에게서 아빠의 행동을 배운 것이 거의 없는게 문제다. 보고 배운 아버지와 막상 자신이 아빠가 된 현실과의 차이는 너무도 크다. 그래서 방황하고 또 외롭다.

중년의 남자는 '바나나 껍질'을 밟고 있다. 그 발에 힘(권위)을 주는 순간 가정이건 직장이건 어이없이 미끌어질 수밖에 없다.

가장에서 동반자로 자리매김된 남자는 하지만 여전히 권위의 굴레에 싸여 세상의 길을 자신이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와중에 한번 삐끗해 옆길로 빠지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압박감을 혼자 짊어진다.

현대 사회는 모두가 내비게이션처럼 목표점이 뚜렷하고 진행 방향이 빈틈없이 또렷하길 원한다. 그러나 최소한 가족만이라도 아버지가 나침반이길 원해야 한다. 나침반의 바늘은 항상 흔들리지만 자기장 때문에 결국에는 제 위치는 찾는다. 바나나 껍질에서 내려서는 용기와 사랑의 자기장을 만드는 일이 중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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