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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두뇌(頭腦)로 이룬 ‘타격왕’ 고원부

오늘의 한국프로야구가 있기까지 숨은 공로자 역할을 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재일동포 야구선수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일본프로야구에서 활동하다 장훈 선수의 주선으로 한국으로 자리를 옮겨 선수생활을 이어간다. 이들은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프로야구에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훌륭한 기량과 풍부한 경험을 한국야구에 심어 주는 역할을 했다. 장명부, 김일륭 등 대부분 투수들이 좋은 활약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타자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성적을 남긴 선수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1989년 3할2푼7리로 재일동포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타격왕 타이틀을 거머쥔 고원부 선수이다.

그는 일본 중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여 4년간 1군에서 4경기밖에 뛰지 못했던 무명 선수였다. 그 시간동안 철저한 기본기와 자기관리를 하는 법을 배우고 실력을 키워가면서 1군 진출의 꿈을 키워 나갔다. 이러한 노력 끝에2군 올스타 전에서 MVP로 선정될 정도로 실력이 향상되었는데, 84년 그는 재일동포 선수들이 흔히 겪는 설움과 차별에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해 코치를 폭행하는 사고를 저지르고 일본프로야구에서 영구 퇴출을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평소 고원부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한 장훈 씨의 권유로 한국행을 결정하고 짐을 꾸리게 된다. 그 때 그의 나이 스물다섯 한창 혈기 왕성한 시기였다. 그러나 고국 땅을 밟은 그를 사람들은 달갑게 받아 주지를 않았다. 더군다나 코칭스태프 폭행 이라는 꼬리표를 떼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그의 아버지가 일본 ‘야쿠자’ 중간 보스라는 이야기까지 돌 정도로 입단 초부터 힘든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막상 그를 만나 보면 그러한 선입관이 잘못이라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된다.

얼굴이 동안(童顔)인데다가 장난기 많은 소년 같은 외모에 체격도 작기 때문에 저런 친구가 설마 코칭스태프를 폭행했을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처음에는 팀 동료들도 그와 살갑게 지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고원부는 말없이 훈련과 시합에만 집중하면서 첫해를 보냈다. 성적은 2할4푼 5리 좋은 성적을 올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데뷔 2년째인 87년에는 3할2푼4리로 자신의 자리를 다져나가기 시작하게 된다.



그러면서 소속팀 빙그레가 탈꼴찌를 하는데 공헌하게 된다. 사실 고원부는 배트 스피드나 파워, 주루 능력이 특출난 플레이어는 아니다. 그러나 상대 투수의 투구 패턴을 재빨리 읽고 자기가 좋아하는 공을 노려 치는 예리함과 센스가 매우 뛰어나 그 장점을 십분 발휘하여 안타를 만드는 기술이 출중한 선수이다. 이 방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였다.

그는 이러한 기량을 후배 선수 장종훈에게 물려주어 중거리 타자였던 장종훈을 홈런타자로 탈바꿈 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선배이기도 했다. 장종훈은 지금도 고원부를 은인(恩人)으로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태평양 돌핀스 코치로 활약하면서도 자신의 기량을 살려 훌륭한 타자들을 많이 배출했을 뿐 아니라 만년 꼴찌 팀이었던 태평양을 준우승까지 시키는 돌풍의 진원지 역할을 했던 선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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