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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언덕] 마음을 산에 두고

[LA중앙일보] 기사입력 2000/08/25 11:03

오늘도 산을 보고 산다. 날마다 산에 오르지는 못하지만 먼 산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산다. 등산가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산과 수석을 좋아한 시인 박두진은 산을 “내 영원한 어머니”라고 불렀다(‘설악부’). 잘 맞는 표현인 것 같다. 그 어머니를 만나러 멀리 산에 가지는 못한다 해도 마음과 가슴을 산에 두고 살면 좋다.

수수만년 침묵을 지켜왔고 앞으로 영원히 침묵할 산. 한결같이 지조를 지키는 산. 산은 온갖 생명을 지킨다. 받지 않고 주기만 한다. 산은 기를 베풀고 만물이 생산되게 하는 곳이다. 생산자요 수호자요 피난처다. 산의 흙은 우주의 살이고, 산의 바위는 우주의 뼈다. 이 살과 뼈 속에 영혼이 살아있다.

성경 신구약에 나오는 산이 적어도 스물하나나 된다. 그중에는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난 산이 많다. 예수 그리스도가 고뇌에 빠져있던 곳, 기도한 곳, 큰 변화를 일으킨 곳, 산상수훈을 베푼 곳, 시험 받은 곳, 예언한 곳, 승천하신 곳, 이 모두가 산에서 이루어졌다. 우연한 일이 아니다. 창조자, 조물주와 직접 대화하는 숭고한 장소가 산이다.

동서양의 신화와 전설에도 산과 관계되는 얘기가 많다. 한국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온 곳이 태백산이었다. 이 거룩한 산은 세계의 중심을 상징한다. 인도에도 천지창조와 관련한 세계의 중심에 ‘산 기둥’이 서있는 신화가 있다. 높은 산 봉우리는 영이 세상을 내려다 보는 곳이다. 한국 풍속에서는 산신, 산신령을 숭배하고 기도를 드리기
도 한다.

한국과 해외의 여러 산들을 두루 둘러본 어느 등산가는 한국의 산이 제일 아름답고 아기자기하고 신묘하다고 말해준 일이 있다. 그는 한국의 산은 명산만이 아니라 어느 산이나 다 그렇다고 했다. 그런 산에서 솟아난 물은 물론 맑고 맛이 있고 약이 된다. 산 좋고 물 좋은 고장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한국인들은 유난히 더 산을 사랑하지 않을까.

한반도 통일을 얘기할 때면 으레 설악산, 금강산, 백두산, 지리산, 한라산이 화제에 따라다닌다. 겨레의 혼과 멋이 담겨있기 때문인가보다. 남산, 북악산, 도봉산을 빼놓고는 서울을 그려볼 수가 없다. 역사의 숨결과 함께 추억의 음악이 들리기 때문이다.

산은 산새와 바람에게 말을 시켜놓고 조용히 듣는다. 떠도는 구름의 얘기를 귀담아 듣는다. 말이 많은 사람들, 말 많은 자신, 그리고 말 많은 세상에 지쳤는가. 산으로 가자. 산에 안기자. 언젠가는 돌아갈 산에 말없이 파묻혀 보면 산 같이 산다. 무겁게 산다.
말이 없는 산은 겸손하다. 앉았거나 엎뎠거나 서있거나, 산은 항상 겸손하기만 하다. 기원전 5/6세기 그리스의 극작가(비극시인) 에스킬루스
(Aeschylus)는 “겸손을 네 생명보다도 더 존귀하게 여기라”고 충고했다. 겸손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오만불손하게 구는 짓을 출세로 착각하는 현대인에게 이런 말이 잘 들릴까. 산을 보고 겸손을 터득하라. 산에 가서 밤을 새우며 겸손을 위해 기도해 보자.
도시의 소음과 쓰레기와 스모그에 지쳤는가. 컴퓨터와 인터넷에 골치가 아픈가. 자연의 어머니 산으로 가자. 울창한 나무들 숲속에 그림자 없이 몸을 완전히 내던져 보자. 거기서 마음을 완전히 열어놔 보자.
마음 속의 ‘내 영원한 어머니’는 어느 나라 산에서든지 만나게 된다. 마음도 가슴도 산에 두고 살고 싶다.

<시인, 라번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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