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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실패 후에 더 빛났던 삶

[LA중앙일보] 발행 2011/03/17 미주판 22면 기사입력 2011/03/16 18:22

이종호/논설위원

최고의 백과사전 선물 남긴
동아출판사 김상문 전 회장
좌절 이겨낸 '낭만인생' 귀감


신문 한 귀퉁이에서 만난 짧은 부음기사에 한참 눈을 떼지 못했다. 지난 주 동아출판사 창업주 김상문 전 회장의 별세 소식이었다.

1986년 막 두산그룹에 인수된 독산동 동아출판사에서 1년여 일할 때가 떠올랐다. 회사의 주인이 바뀐지 1년이 지났지만 옛 직원들은 한국 최대 출판사의 몰락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점령군처럼 들이닥친 새 사람들과도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해 서걱거렸다. 그때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이름이 김상문이었다. 그가 남긴 그늘이 그만큼 짙었다.

지금 40~50대라면 누구나 동아전과 동아수련장을 기억할 것이다. 교학사의 '필승' 시리즈와 함께 중학생 참고서 시장을 양분했던 '완전정복' 역시 동아출판사의 것이었다. 김상문 회장은 그렇게 70~80년대 학습참고서 시장의 황제로 군림했다.

그가 처음 출판업을 시작한 것은 26세 때인 1941년이었다. 동아출판사는 1945년 설립했다. 이후 '신생국어독본'을 시작으로 각종 사전 교과서 참고서 등을 잇따라 펴내며 한국 최대 출판사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김 회장이 정말 남달랐던 것은 특유의 고집과 추진력이었다. '문화 선진국이 되려면 우리도 영국의 브리태니커 같은 한국을 대표할만한 백과사전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평소 신념을 행동으로 옮긴 것만 봐도 그렇다.

주위에선 한결같이 말렸다. 그럼에도 그는 참고서로 번 돈을 모조리 백과사전 편찬에 쏟아부었다. 1978년 착수한 편찬작업은 기간도 돈도 계획보다 몇 배가 더 들어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 백과사전의 신기원을 연 '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 30권은 그렇게 완성됐다. 1984년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고가의 고급 백과사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다. 때맞춰 쏟아져 나온 덤핑 짝퉁 백과사전들까지 시장을 어지럽혔다. 판매는 부진했고 급기야 회사는 새 주인을 찾아야 했다. 필생의 사업이 오히려 김 회장을 사지로 내 몬 것이다. 훗날 어떤 인터뷰에서 김회장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습니다. 어렵게 구한 비상을 복주머니에 넣고 다녔죠. 그런데 죽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더라고요.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데 누가 그 복주머니를 소매치기해 간 거예요. 하나님이 죽지 말라고 하시는구나 싶었죠. 그래서 죽을 각오로 다시 도전해보자 생각했어요."

당시 그의 나이 일흔살이었다. 마음을 고쳐먹으니 다른 길이 보였다. 출판 일도 다시 했지만 그보다는 건강전도사로 강의자로 더 왕성하게 뛰었다. 2001년엔 서울대 의대에 사후 시신 기증을 약속했고 90세 때에는 '100살 자신있다'라는 건강서적까지 펴냈다.

김상문 회장은 100살에서 4년 모자란 96세로 세상을 마쳤다. 일찍이 남겨둔 유언에서 관 속에 동아백과사전을 넣어달라고까지 했다니 그의 회한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그 유언을 고집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삶에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부와 명예 경쟁과 성취가 아니라 건강과 화목이라는 것을 그는 커다란 실패 후에 뒤늦게 깨우쳤다. 그리고 70세 이후 26년을 전혀 새로운 인생으로 살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출판인으로서 못 다 이룬 꿈에 더 이상 미련 두지않고 홀가분하게 떠나지 않았을까 싶다.

김상문 회장의 집념이 낳은 동아백과사전은 1996년 이름을 바꿔 '두산세계대백과사전'으로 다시 출간됐다. 그리고 지금 인터넷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공짜로 찾아보고 있는 네이버 사전도 바로 그 백과사전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너무나 값진 선물을 우리에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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