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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속 뉴스]아메리카 인디언

지난 9일자 주류신문 1면엔 모처럼 인디언 원주민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정부의 고위관리가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한 역사에 대해 사과했다는 내용이다.

대통령이나 연방의회에서 나온 공식 사과도아니다. 연방 내무부 산하의 인디언 담당국장이 부서 창립 175주년을 맞아 발표한 사과문이다.

흑인들은 남북전쟁이 끝나자마자 시민권이 부여됐지만 인디언들은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민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2차대전때 사막으로 끌려가 잠시 집단수용소 생활을 했던 일본계도 정부의 공식 사과와 함께 보상금을 받아냈다. 인디언들에겐 그러나 400년이 지난후 고작 정부의 국장이름으로 사과했을 따름이다.

무엇때문일까. ‘인종청소’라는 비난을 받을까 우려했기 때문은 아닐까. 유고슬라비아에서 세르비아계의 이슬람계에 대한 살육을 ‘인종청소’라고 비난하며 코소보를 공습한 미국이지만 정작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는 인정치 않으려는 모양이다.



‘댕스 기빙 데이’는 인디언들에 대한 보은의 표시로 1621년 처음 시작됐지만 이후 부터는 피의 역사가 반복됐다.
더불어 함께 살았던 인디언들이 왜 학살의 대상이 됐을까.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지난 삶을 정리해 본다.


유럽의 백인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산건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이 처음이다. 1609년 마을이 세워져 인구는 3,000명이 넘었던 것으로 기록에 나와있다.

몇해전 디즈니 만화영화로 제작돼 히트했던 ‘포카혼타스’(Pocahontas)는 바로 제임스타운의 백인 커뮤니티와 인디언들간의 관계를 그린 것이다.
그해 기근이 들어 백인들은 먹을게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굶어죽은 사람의 인육을 먹는 최악의 상황에 까지 내몰렸다. 얼마못가 제임스타운은 유령도시가 될 판이었다.

이때 구원의 손길을 편게 인디언들이다. 원주민들은 그래도 먹을게 남아있었다. 이를 백인들에게 나눠준 것이다. 인디언들이 제임스타운의 참상을 외면했더라면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진출은 한참 후에나 가능했을 것이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에게 처음으로 옥수수와 호박 농사를 가르쳤다. 담배 경작법도 알려줬다. 때마침 유럽의 상류사회에서 담배가 유행하자 제임스타운의 백인들은 엄청난 부를 챙겼다.

버지니아를 비롯한 인근 지역이 담배농사의 메카로 자리잡게 된 것은 ‘포카혼타스’ 인디언 덕분이다.
백인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또 돈까지 벌게 해준 인디언들이 왜 학살의 대상이 됐을까. 관습의 차이에서 비롯됐다는게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인디언들은 농사도 지었지만 원래는 사냥이 주업이었다. 땅을 소유한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반면 유럽인들은 부락을 세우고는 농경지를 찾았다. 소유의식이 강했던 것이다.

백인들은 인디언들이 필요로 하는 생필품을 주고는 땅을 사들였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땅을 팔고서도 사냥은 계속했다. 사냥은 아무 곳에서나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 때문이다.
결국 남의 땅에서 사냥을 했으니 충돌이 일어나게 됐다. 사냥터를 빼앗긴 인디언들이 보복으로 백인촌을 습격해 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인디언 인구는 100만명이 넘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300년동안 계속된 학살로 1900년에는 30만명으로 줄었다. 늘어나기는 커녕 3분의 1 이상이 살해당한 것이다.
지금은 거의 100만명에 이른다. 그나마 인디언 피가 8분의 1만 되도 원주민으로 분류해 이 정도가 된 것이다.


인디언 전쟁

▲ 필립왕 전쟁
1675년 플리머스에 정착한 백인들이 인디언과 벌인 전쟁이다. 백인들의 착취가 심해지자 이에 분개한 인디언 추장 필립이 봉기한 것이다.
당시 백인들은 인디언 추장들에게 영어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인디언 이름을 발음하기도 어려워 자기 멋대로 부른 것이다. 필립이 이같은 경우다. 2년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백인들은 1,000명이나 숨졌다. 인디언 사상자는 아예 기록에 나오지도 않는다.

▲ 프렌치-인디언 전쟁
영국과 프랑스가 아메리카 대륙의 지배권을 놓고 벌인 싸움에 인디언들이 말려든 전쟁. 두 나라는 인디언들에게 술과 총을 주며 환심을 산 다음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결국 인디언들이 두패로 갈라져 영국과 프랑스의 대리전을 치른 꼴이 된 것이다.

▲ 눈물의 트레일
1838년 여름 체로키족 1만5,000명을 포로처럼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끌고가 강제 수용한 사건. 정부가 네브라스카 인근의 벌판에 수용소나 다름없는 보호구역을 설정해 놓고 인디언들을 끌고 간 것이다.
1,200마일이 넘는 이 길을 인디언들은 ‘눈물의 트레일’이라고 불렀다. 4,000여명의 원주민들이 떼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부녀자 겁탈은 예사였고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잔인하게 죽였다. 어느 백인 병사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가를 체로키족의 행군에서 알게 됐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였다.

▲ 수(Sioux) 전쟁
1800년대 중반 사우스 다코타의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백인들이 이 땅을 빼앗기 위해 벌인 싸움. 수족과 샤이엔(Cheyenne)족이 연합해 백인들에 대항한 전쟁이다. 250명의 백인 병사들이 몰살당하는 전투도 있었으나 결국 두 부족은 정부군에 쫓겨 항복하고 말았다.

▲사막의 전투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이 틈을 타 애리조나와 텍사스, 뉴멕시코에 살았던 나바호족과 아파치족이 백인촌을 습격했다. 제로니모라는 걸출한 인디언 추장이 전투를 지휘, 백인들의 피해가 엄청나게 컸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정부는 대병력을 동원, 총을 들만한 인디언들은 모조리 살해하고 여자와 어린이는 사로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1890년 12월 30일 전쟁
제 7기병대가 사우스 다코타에서 수족을 집단 학살한 날. 금광이 발견된 곳이 마침 인디언들의 성지여서 양측의 인명피해가 컸다. 정부군은 당시 처음 개발한 호치키스 기관총으로 무차별 난사, 500명의 인디언들을 학살했다. 바로 인디언과의 300년 전쟁이 끝난 날이었다.
당시 인디언 인구는 30만명. 대부분 서부에 흩어져 있는 187개 보호구역에 수용된 숫자다.



인디언 이주법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백인들에겐 영웅, 인디언들에겐 치욕의 역사를 안겨준 인물이다. 인디언 토벌로 명성을 얻어 백악관에 들어간 잭슨은 1830년 인디언 이주법(Indian Removal Act)을 제정했다. 미시시피강 동쪽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에게 몽땅 철거명령을 내린 것이다.

서부에 인디언 보호구역을 만들어 주고 강제 이주를 시켰다. 이에 불복한 체로키족이 대법원에 위헌소송을 냈다. 당시 대법원장은 존 마셜. 인디언측에 승소판결을 내렸으나 잭슨은 대법원 판결을 따르지 않았다.
처음엔 잭슨도 이 법이 비극을 낳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같다. 보상금을 주며 인디언들을 설득해 거주지를 옮기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인디언 땅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농경지가 비옥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백인들의 잔혹한 인디언 토벌작전이 벌어지게 됐다.



오클라호마 랜드 러시

1889년 4월 22일 정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 오클라호마에서 벌어졌다. 서부개척을 부추긴 연방정부가 땅을 공짜로 분양한 날이다. 총성이 울리자 수천명의 백인들이 말을 달렸다. 먼저 말뚝을 꼽으면 땅주인이 된 것이다.

인디언 거주지역에서 이같은 해괴한 일이 생긴 것이다. 땅이 기름지다는 소문이 나돌아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황량한 들판이 순식간에 도시로 탈바꿈한 것이다.
백인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며 흥분했겠지만 인디언들은 눈물을 삼켜야 했다. 당시 신문들은 이를 ‘랜드 러시’(Land Rush)라고 불렀다. 인디언 땅을 빼앗아 만든게 바로 오클라호마다.



포카혼타스

1609년 백인들의 첫 정착촌인 제임스타운에 기근이 들자 이를 도와줘 터를 잡게 만든 인디언 처녀. 당시 유럽인들에겐 성녀나 다름없었다.
백인들에게 납치돼 제임스타운에서 자랐지만 총명한 탓인지 백인들이 영어를 가르쳤다. 처음 접한 서구문화에 매료된 것이다.

당시만해도 인디언들은 백인들과 반목하며 싸움을 벌이기 일쑤였다. 그러나 딸의 설득으로 추장은 굶어죽어가는 제임스타운을 살려준 것이다. 이 덕분에 정착촌은 제자리를 잡아 유럽에서 이민자들이 대거 몰려오게 됐다.
포카혼타스는 이후 백인과 결혼해 영국에서 살았다. 런던의 사교계에 진출해 왕실을 무상출입할 정도로 유명인사가 된 것이다. 1617년 22세의 나이로 아깝게 숨졌다. 만화영화 ‘포카혼타스’는 이 인디언 여인의 삶을 그린 것이다.



인디언 서머(Indian Summer)

유럽인들이 처음 제임스타운에 정착했을 때 이들은 겨울 날 일이 큰 걱정이었다. 11월에 접어들자 벌써 혹한이 몰아닥쳐 월동준비를 할 겨를이 없었다.

인디언들이 안심시켜준게 바로 ‘겨울속의 여름’이다. 포근한 날씨가 2∼3주 가량 계속될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인디언들의 말대로 여름같은 날씨가 찾아오자 백인들은 이를 ‘인디언 서머’라고 불렀다.



박용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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