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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한국인 미술가들 (121)] 조각가 박성태…동양적 조형언어로 생명의 실상과 의미를 추구

젊은 시절 전통 회화 공부 후 조각으로 전환
인물과 동물 소재로 새로운 조각표현 개척

조각가 박성태는 1960년 전남 광주시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해 동양화를 공부하고 이어 같은 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2010년 9월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 현재는 뉴저지주 리지우드에 살면서 미국과 한국 등을 오가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박성태는 한국에서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화단에 나서 작가 활동을 했다. 1993년 토 아트스페이스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한국과 중국, 미국 등에서 14차례 개인전을 가졌고 수십회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대표적인 그룹전으로는 199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젊은 모색'90-한국화의 새로운 모색전’, 1997년과 2000년에 개최된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2003년 서울시립미술관의 ‘유쾌한 공작소전’, 2010년 부산비엔날레 등이다.

1993년년과 1994년에 MBC미술대전 우수상을 수상했고 현재 그의 작품들은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시립미술관, 서울대학교 박물관, 수원 월드컵 경기장, 제주도 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박성태는 어린 시절 자유스러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어쩌면 그러한 자유 속에서 장래 미술가로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것으로 보인다.



“나는 9남매중의 막내로 태어난 관계로 공부하고는 담 쌓고 지냈다. 공부보다는 들로 산으로 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심심하면 그림 그리고, 만들고. 자유분방하게 방목과 같은 환경에서 자란 관계로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국어책 읽기가 옹색하고 싫었다.”

박성태가 본격적으로 미술에 눈을 뜬 것은 청소년 시기다. 고교 시절 광주에 있는 로뎅화실을 찾게 됐고 여기서 수채화가 강연균 선생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미술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박성태는 그림을 시작하면서 모딜리아니를 좋아하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고 말했다.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서울대 미대에 들어가서도 이어졌다. 박성태는 서울대 미대 회화과의 입시요강에 맞춰 수채화와 소묘 등을 공부했으나 2학년 때 동양화과를 선택하게 된다. 중학교 2학년때부터 유화를 접했으나 입시준비 중 수채화의 명도와 채도 문제로 갈팡지팡 하면서 어려움을 겪은 것이 원인. 여기에 동양화는 그림이 아니라는 선입견까지 있었으나 2학년 동양화 첫 수업에서 이 같은 생각은 여지 없이 깨지고 결국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도 동양화를 전공하게 됐다.

그렇다고 박성태가 전통적인 동양화의 표현과 작품 제작방법을 그대로 받아 들인 것은 아니다. 그는 “대학원 수업 중에 노가리 작품 시리즈로 3차원 표현 기법을 이용해 설치와 입체작업들을 하면서 보수적인 선생님들과의 전쟁이 시작되고 갈등이 이어지면서 동양화과를 선택한 것을 가끔 후회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작가로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동양화를 배우는 과정에서 얻은 동양사상을 기반으로 한 표현 방법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미국으로 오기 전인 2007년 중국 북경으로 건너 가 작품활동을 했다. 한국과 중국으로 오가면서 활동을 했는데 당시 거주하던 창핑이라는 행정구역은 명나라 황제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근처에 황후의 능이 있는 작은 산간 마을이었는데 이곳에서 외부와 일정 수준 단절된 채, 나 스스로의 작품세계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당시 그곳에서 작품을 할 수 있었던 것이 현재까지 작품에 몰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 것으로 생각된다.”

박성태의 작품은 이러한 삶의 과정을 통해 구축된 동양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생명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 중에는 인물과 말 등을 3차원 조형언어로 표현한 조각작품이 많다. 그는 이러한 인물과 동물 등의 작품을 천과 알루미늄 등의 다양한 재료로 만든다. 인물들이 집단으로 모여 있는 군상도 있고, 인체의 일부를 단절시켜 표현한 작품, 또 말이 생동감 있게 뛰는 2차원 릴리프 부조 스타일의 작품도 있다. 그의 이러한 작품세계는 크게 두 단계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작품활동을 시작하던 초기, 사회적인 상황을 작품에 끌어들인 단계다.

“당시 내가 작품을 하게 된 동기는 사회적인 현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 물론 이는 현재의 작업에도 깊이 내재될 수 밖에 없는 외적 동기다. 나는 대학 1학년때 광주민주화운동을 현장에서 경험하면서 죽음과 생명, 존재, 잔상 등 어쩌면 무지개 같은 생명현상에 관심을 가졌다.”

박성태의 이러한 작가의 신념은 1988년 테라코타 작품들을 발표한 일민미술관 초대전에 잘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이 전시를 거치면서 학창시절부터 부딪히고 고민하던 사회문제에 대해 매듭을 짓는다.

그리고 박성태는 다시 새로운 항해를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생명에 관한 문제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생명의 의미와 가치를 담기 위해, 이에 합당한 형식을 갖추기 위해, 이 산과 저 산, 들과 강으로 다녔다. 이런 과정에서 한지를 사용한 입체 설치, 섭씨 800도 정도의 온도에서 구워내는 동류화(일종의 칠보기법), 테라코타 설치작업 등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박성태는 재료를 다루는 문제에서 심각한 문제에 봉착한다. 너무 무겁고 힘에 겨운 노동의 강도 때문에 가벼움에 대한 소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그의 작품은 뉴욕에 오면서 새로운 모습을 바뀌고 있다. 알루미늄 망사로 기초 형상을 제작하고 다시 굳히는 작업, 그리고 천을 사용해 무엇인가 모양이 있는 형상을 만드는 작품으로 변화하고 있다. 박성태는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 “이전의 망사 작업에서 보여지는 그림자보다, 더욱 표피적인 껍질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들이다”라고 설명한다.

박성태는 이러한 자신이 작품들의 밑바탕에 깔린 예술적 신념을 이렇게 풀어서 설명한다.

“형식적인 파괴와 일탈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의 작업들에는 동양적인 사고와 질료에 대한 해석이 있었다. 현재의 망사작업에 나타나는 기본적인 구조, 즉 방점 같은 사각 틀을 구성하는 수직과 수평선은 동양의 음과 양을 상징하는 씨줄이자 날줄로 해석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시인 김지하의 생명사상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숙성시켰다. 나는 작품을 통해 생명에 대한 나의 생각을 여과 없이 보여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

박종원 기자 jwpark88@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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