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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업] 사랑과 믿음으로 키워주신 어머니께

수잔 정/소아정신과 전문의

엄마 오월이군요. 67년간 함께 했던 아버지를 떠나보내시고 처음 맞이하는 어머니 날에 이 편지를 올립니다.

큰 믿음과 인내로 저희 네 형제를 길러주시고 이제 10명의 손자 손녀와 4명의 증손을 지켜주시는 엄마가 계시니 아버지도 평안하게 미소짓고 계실 거예요.

최근에야 엄마는 한 살짜리 저를 업고 고향인 평안남도 개천을 떠나서 삼팔선을 넘어 피란오시던 옛 이야기를 해주셨지요.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온갖 죽음의 순간들을 비켜가며 저를 지켜주셨던 엄마. 아버지의 공무원 직업 때문에 전쟁 후에도 우리는 숱하게 이사를 다녔지요. 그런데 저는 한 번도 엄마가 피곤해 하거나 찡그린 얼굴을 본 적이 없어요.

인천 동명초등학교에서 1학년을 마치고 통통배를 타고 목포로 가는 뱃길에서 엄마와 저는 심한 배멀미를 했었지요. 그래도 목포 바닷가에 있었던 새 집에는 유달산 기슭의 진달래 꽃들이 아름다웠고 외로운 피란민 새댁 엄마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셨죠.



3학년이 되면서 우리 가족은 다시 충남 예산으로 이사를 갔었지요. 알뜰한 엄마의 살림 덕분에 우리는 산성동 언덕 위에 넓은 밭이 있는 기와집에서 살게 되었죠. 감자와 고구마를 주렁주렁 흙 속에서 캐내는 멋진 추억을 선사해 준 곳이었습니다.

어느 여름날 읍내 양조장에 걸어가서 막걸리를 받아다 밭일하던 아저씨들께 대접하라고 엄마가 심부름 시킨 것 기억하세요? 오는 길에 개울물 건너면서 주전자에 입을 대고 막걸리 좀 마신 것 이제야 엄마에게 고백합니다. 엄마는 그 때 이미 아셨던 것 같네요. 술 반잔만 마셔도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제가 그때는 오죽했겠어요? 그렇지만 엄마는 제게 수고했다고 칭찬만 해주셨지요.

스코필드 박사님의 권유로 불쑥 의과대학에 입학한 것이나 무작정 미국으로 수련을 받으러 떠나온 것도 엄마가 보여주신 저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세 아이들을 기르면서 얼마나 엄마의 육아 방법을 따르려 노력했는지 아세요? 직업이 소아정신과 의사로서 모든 이론을 공부했다고는 해도 엄마가 저희에게 보여주셨던 사랑과 인내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옳은 길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32살이 된 막내를 출산할 때에 이민오셔서 세 아이들을 사랑으로 자랄 수 있도록 해주신 은혜에 무엇보다도 머리를 숙여 감사드립니다.

어느 날 은하가 뛰어다니다가 책상 모서리에 부딪치고 아파하자 엄마는 '왜 조심하고 살피지 않았느냐?'고 야단치시는 대신에 '할머니가 책상을 잘 못 놓아서 너를 다치게 했구나' 말씀하시며 오히려 아이를 위로해 주시는 걸 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은하는 어디에 가도 늘 리더 노릇을 하며 자신에 차있는 듯 합니다.

엄마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 그리고 열심히 봉사하시는 교회 신도님들과 함께 즐거운 여행도 많이 하시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드세요. 그리고 항상 그러셨던 것처럼 많이 웃으세요.

엄마 부디 건강하시고 오래 오래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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