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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신인문학상] 단편소설부문 가작…건너야 할 강

[LA중앙일보] 발행 2011/05/24 라이프 14면 기사입력 2011/05/23 15:08

박숙자

교수 회의가 끝나자마자 학장실로 돌아왔다. 창 밖에는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서편 하늘에는 노을이 붉다. 학생들이 바쁘게 오가던 캠퍼스는 이제 정적이 흐른다. 퇴근 전에 밀린 우편물을 정리하는데, 학술잡지 등 수많은 인쇄물 중에서 푸른 볼펜으로 차분하게 주소를 쓴 항공 우편이 눈에 띈다.

보낸 이는 라이언 존스(Ryan Jones), 그 이름을 보고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친애하는 닥터 김"으로 시작하여 컴퓨터로 쓴 편지에 볼펜으로 사인했다. 그 애가 나를 닥터 김이라 부르다니…… 너무나 의례적인 호칭이라 마음에 걸리지만 어떻게 나를 달리 부를 수 있나?

"엄마의 장례를 한 달 전에 치렀습니다. 닥터 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할지 한참 생각하다가 편지합니다. 유방암 때문에 약물 치료로 고생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엄마 나이를 기억하실지 몰라도 이제 겨우 50입니다……."

나는 무의식 중에 헉하며 앞으로 고꾸라진다. 지금까지 나 자신의 일이 아니면 모두 무심하게 지나쳐 온 나, '가슴이 무너진다.'라는 말의 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나, 라이언이 한 달 전에 치렀다는 메기 존스 장례식의 프로그램을 드려다 본다. 자신이 컴퓨터로 고안한 것 같으며, 복사 용지를 반으로 접어 앞뒤 4페이지로 만들었다. 표지에는 힘차게 쏟아지는 폭포, 하얗게 부서지는 물살, 폭 넓은 강 위로 긴 다리가 놓여 있다. 그 경치를 배경으로 웃고 있는 중년의 메기. 살이 조금 오른 것 같으나 젊은 시절의 모습이 남아 있다.

표지의 배경이 눈에 익어 자세히 보니, 옛날 메기가 살던 미국 남부 조지어 주(州)에 있는 코머(Comer)라는 곳에 있었던 그 긴 다리이다. 특이하게 지붕 덮인 다리였다. 이런 종류의 다리로는 조지어 주에서 가장 길다고 했다. 어머니가 생전에 좋아했던 그곳을 표지로 했구나.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풍경인가? 왓슨 밀 (Watson Mill) 다리와 폭포, 그리고 강은 메기 집에서 가까웠다. 브로드 리버, 이름조차 폭 넓은 강이라고 했다. 강을 따라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산책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30년 전, 내가 애틀랜타 시내에 있는 조지어 텍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시절, 주말에 거길 가면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코머는 애틀랜타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두 시간 떨어진 곳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메기는 내가 있던 생화학과의 비서였다. 메기의 모친은 보스턴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메기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고 그와 헤어진 후 그곳에서 메기를 기르며 슈퍼마켓에서 일했다. 집이 가난하여 메기는 일찌감치 대학을 포기하고 일을 시작했다. 워낙 부지런하여 사무실 일이 끝나면 실험실에 와서 시험관이며 비커 등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메기는 언어감각이 뛰어났으며 작가 되기를 원했다. 내가 쓰고 있던 박사 논문의 어색한 영어, 소위 콩글리쉬를 손봐주었을 뿐 아니라 논문구성이며 앞뒤 서술 형식까지 고쳐주었다. 그 당시 선다형, 객관식 시험 등 한국식 교육의 결과로 글 쓰는데 훈련이 안 되었던 나는 창피한 얘기지만 고등학교만 나온 시골 아이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항상 남을 도와주고 감정이 풍부한 메기는 동양인에게 호기심이 있어 혼자 있는 나를 위해 음식도 가져오고 과자도 구워 주었다. 하루는 왓슨 밀 다리 이야기를 하면서 주말에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어머니가 그곳에서 가까이 살아 점심에도 초대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동양인을 무시하는 백인 여자들을 자주 보았다. 특히 남부지방이라 인종편견이 심한 고장이었지만 메기는 자유스럽고 편견이 없었다. 보수적인 여성들이 볼 때 메기는 가난한 화이트 트레쉬(white trash)였다.

아내가 먼저 학위를 받고 첫돌 지난 아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우리 내외는 동갑인데 나는 군 복무 때문에 늦게 미국에 왔으므로 아내보다 1년 더 머무르게 되었다. 한국에 가족이 있고 또 나이가 열 살이나 더 많은 걸 알면서 메기는 내게 관심을 보였는데 그것이 싫지 않았다. 한국 남자로서는 큰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 용모에는 자신이 있었고, 생전 처음 백인 여자를 상대하니 마음이 붕 떴다. 어느덧 논문도 거의 끝나가고 마음에 여유가 생겼으므로 그 터질듯한 젊음, 자유분방한 아이의 초대를 마치 보너스라도 타는 기분으로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여름날 오후, 우리는 강가로 갔다. 아름드리 큰 플라타너스 한 그루가 강물 위로 쓰러져 있었다. 메기와 나는 강물에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걸어가 나무둥치 위에 걸터앉았다. 짙은 나무 그늘, 발밑으로는 강물이 유유히 흘러가고, 강바람이 시원하였다. 빛나는 금발에, 그녀의 눈은 깊은 바다와 같이 초록빛이었다. 몸에 꼭 끼는 청바지에 목이 깊게 파인 흰 블라우스, 체격이 빈약한 아내만 보아온 나는 몸을 떨었다.

여간 해서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나였다. 혼자 힘으로 유학 오고 또 이름있는 집안의 딸을 유학 중에 만나 결혼하여, 한 번도 내 마음의 고삐를 놓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 둘 다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자란 이야기를 하였고, 나는 서툰 영어로나마 마음을 털어놓았다. 가정교사 노릇을 하던 중 가르치던 아이가 대학에 떨어져 그 집에서 당장 쫓겨난 이야기를 했더니 메기가 한없이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시절'이란 말을 들으면, 으레 그 한적한 여름 오후, 쓰러진 나무 둥치 위에 앉아 그녀와 보낸 시간을 떠올리곤 한다. 그해 여름은 내 인생의 여름이었다. 일생 중에 그때가 유일하게 거리낌 없이 생각하고 행동한 시절이 아니었을까? 메기와 나는 주말마다 그 공원에 가서 아무도 없는 언덕 위로 갔다. 내가 나무둥치에 기대앉으면 그녀는 내 무릎 위로 올라앉아 두 팔로 나의 목을 감았다. 땀으로 끈적이는 그녀의 젖무덤, 내 혀끝에 말려 있는 젖꼭지의 감촉, 나를 원하였으므로 능동적이었고 나를 가졌으므로 황홀한 메기가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늘 차갑게 느껴온 아내에게서 경험하지 못했던 희열이었다. 눈을 감고 그날을 생각하니 지금도 메기의 입김을 느끼는 듯하다.

장례식 프로그램을 다시 들여다본다. 표지를 넘기니 둘째와 셋째 페이지에 식순이 적혀 있다. 나는 어느덧 시골 교회에서 치러지는 조촐한 장례식 앞자리에 앉아 오르간 장송곡을 들으며 그녀의 마지막 시간을 생각해 본다. 약물 치료로 머리칼이 빠지고 먹지 못해 초췌해진 메기의 모습,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메기의 자존심이었고, 자제력이었다.

마지막 페이지 유가족 난에는 아들 라이언, 며느리 캐슬린, 손자 에디라고 적혀 있다. 또 시(詩) 한 수가 적혀 있는데 마지막 몇 마디가 이러하다.

"…….
외롭고 가슴 아플 때는
친구들에게 가서 좋은 일을 하며
네 슬픔을 묻어다오.
날 그리워하되
떠나게 해줘."

빛나는 금발에, 그녀의 눈은 깊은 바다와 같이 초록빛이었다.
몸에 꼭 끼는 청바지에 목이 깊게 파인 흰 블라우스,
체격이 빈약한 아내만 보아온 나는 몸을 떨었다.


지금 심정으로 도저히 집에 갈 수가 없어, 아내에게 전화했다. "여보, 나 오늘 저녁 먹고 들어갈 거야."

"응, 그래. 잘 됐네. 나도 오늘 아주 바빠. 10월 월말 보고서를 우리 부서에서 작성하고 있는데, 집에 가기 전에 다 읽어야 해."

경영학을 공부한 아내는 삼성 계열 회사의 중역이다.

이튿날 토요일 아침, 어젯밤 늦게 들어온 아내가 곤히 자는 사이 나는 등산복 차림으로 일찍 집을 나섰다. 지하철 2호선으로 중림동에 내려 약현 성당 쪽으로 간다. 주위에 고층 건물이 없었던 시절에는 언덕 위의 성당 첨탑이며 아름다운 벽돌 건물을 멀리서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어렵사리 성당 입구를 찾아 본당으로 가는 오솔길을 따라 올라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1891년에 지었다고 한다.

서소문 근처에 살던 어린 시절 어머니 손을 잡고 다니던 성당이다. 소박하나 아름다운 이 성당은 내가 유아세례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요즘은 아내에게 끌려 우리 집에서 가까운 청담동 성당에 다닌다. 나는 이런저런 핑계로 일요일 미사도 빠질 때가 잦지만, 아내는 성당 일이라면 아주 열심이다. 나는 평소에는 소홀히 하고 있다가 어려울 때는 어머니의 추억이 어린 이곳을 찾는다.

30년 전, 메기가 임신했다는 편지를 받고 제일 먼저 찾은 곳도 여기였다. 그 당시 학교에서 전임강사 자리를 얻으려고 여념이 없을 때였다. 같은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에게 혹시 이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웠고 아내가 알까 봐 전전긍긍했다. 괴로웠지만 답장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간신히 고해성사를 보았다. 메기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나, 고해성사가 무슨 소용인가? 그 후 성당에 다니는 그 자체마저 위선인 것 같아 오랜 세월 동안 일요일 미사도 소홀히 했다. 그런데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또다시 자석에 끌리는 쇳조각처럼 이곳에 왔다.

본당으로 올라가는 "십자가의 길'에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은 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을 돌에 새겨 열네 군데에 세워놓았다. 수난과 죽음 사이에 일어났던 그 사건들을 하나씩 묵상하며 나는 간절히 메기를 위해 기도한다. 독한 약물에 시달리며 나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을 것이다. 일생을 소박하게 살며 고생만 하다가 죽은 그녀.

예수님이 기력이 떨어져 십자가를 지고 쓰러지는 장면에서 나는 오래 서 있다. 수난과 죽음을 당한 때가 30대 초반, 나는 그 나이에 남의 어려움과 고통에 무관심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출세와 안락을 위해 남을 이용 만하였다. 메기도 그 중의 한 사람, 영어 회화 연습을 위해 자주 만나다가, 나의 '아름다운 시절'로 인하여 라이언을 낳았다. 작가의 꿈을 접고 생계를 위해 비서직에서 남의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나는 갑자기 멈추어 선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그녀
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달려갈 것 같다.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업적을 마무리하려고 앞으로 몇 년 더 일할 계획이었으나 이제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어제 라이언의 편지를 받고 비수에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낀 데는 이유가 있었다. 2년 전에 라이언이 내게 이-메일을 보내왔다. 그때는 메기가 살아 있었고 내가 한국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의 메일 주소를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그 메일을 깊숙이 컴퓨터에 숨겨 놓고 회답하지 않다가 어제 출력한 것을 안 주머니에서 끄집어내어 읽는다. 예수님이 기력이 떨어져 십자가를 지고 쓰러지는 장면을 새긴 돌 앞에서.

친애하는 닥터 김,

저는 라이언입니다. 제가 누구인지 설명이 필요 없겠지요? 저의 성은 존즈, 나를 길러 준 아버지 성입니다. 어머니보다 20년 연상이었으며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그분이 제게 쏟은 정성을 잊을 수 없습니다. 보이스카우트, 야구 연습 등 항상 저를 데리고 다녔지요. 사랑과 절제를 통해 저를 단련시켜 주신 분입니다.

그러나 저는 생부가 어떤 분인지 알고 싶습니다. 특히 저는 작년에 결혼하여 곧
첫아기가 태어납니다. 유전적으로 유의할 사항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생부가 어떤 분인지 알면 아기 기르는 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건강한 아기가 태어나도록 같이 기도해 주십시오. 연락 바랍니다.

라이언 드림

라이언은 연락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도 사정이 있었다. 그즈음 나는 자연과학대학 학장에 선임되었다. 은퇴하기 전에 학장이 되는 것이 나의 목표였으며 대과 없이 이끌어 온 내 출세에 금상첨화였다. 그전 해에 우리 내외는 여성잡지에 이상적인 부부로 선정되어 표지에 사진이 나오고 긴 기사가 실렸는데, 생화학 부문에서 이룬 나의 학술적인 업적이며, 아내의 신분과 성당에서의 활동 등이 상세하게 기사화되었다. 인터뷰했던 성당 간부의 말을 인용하면 아내는 "하나도 버릴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한번 잡지에 나니까 텔레비전과 신문에서도 인터뷰를 요청해 우리는 화려하게 매스컴을 탔다. 그럴수록 나는 라이언의 이-메일을 깊숙이 숨겨놓고 끙끙 앓고 있었다.

우리 아들 진수의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라이언보다 두 살 위라 서른둘인데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화려한 부모 그늘에서 자라서 그런지 남과 경쟁하지 못하여 어렵사리 얻어준 직장에서 오래 배겨내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주는 생활비로 오피스텔에서 산다.

이튿날 일요일, 아내가 성당 봉사활동을 마치고 다섯 시경에 집에 돌아왔다

"여보, 이리 좀 와요. 긴히 할 말이 있어요."

"주말에 읽어야 할 것이 있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아등바등하면서 살 거요? 여보, 그런 거 중요하지 않아요. 이리 와요. 지금까지 말하지 못하고 미뤄 온 이야기가 있소."

그제야 아내는 긴장하며 내 옆에 앉는다. 조용하게 메기와 라이언에 얽힌 과거를 얘기하니 아내는 석고상과 같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듣고 있다.

"미안해요. 당신한테 이렇게 잔인한 고백을 하게 되어. 오랜 세월 괴로웠소. 이젠 학교에서 은퇴하겠소. 그리고 미국에 며칠 다녀오겠소."

아내가 조용히 일어나 화장실로 가더니 변기에 토하는 소리가 들린다. 자기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낸다. 구토한다든지, 열이 난다든지. 사업을 크게 일으킨 부친의 성격을 닮은 아내는 연민의 정을 일으키기에는 너무나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아내가 두려워 지금까지 감히 말하지 못했는데, 지금 충격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아내의 강직한 성격을 생각하면 앞으로 우리 가정 생활에 큰 파탄이 오지 않을까?

그 이튿날 아내가 출근하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삼 일째 되는 날 한 페이지가량
의 길지도 짧지도 않은, 꼭 할 말만 적은 편지를 놓고 출근했다. 자기 자신과 그 백인 여자를 위해 한마디 한다고 전제하고 나서,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인 것은 알았지만, 이토록 매정하고 경박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고 했다. 앞으로 같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한 인간으로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해야겠다. 아내에게 시간과 공간을 주는 것도 옳을 것 같다. 여행사에 연락하여 애틀랜타로 가는 비행기와 숙소를 예약한다.

1주일 후, 인천 공항에서 출발하여 현지 사각으로 아침 9시 반 경 애틀랜타 공항에 도착했다. 인천서 직행으로 13시간, 대한항공이 애틀랜타 공항을 비롯하여 미국 중요 도시에 직행한다는 것은 바로 국력을 의미한다. 30년 전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두 번이나 비행기를 갈아타며 그 두 배의 시간이 걸렸던 것을 생각하니 감회가 깊다.

애틀랜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등장했던 그 옛 도시가 아니라 1996년 올림픽 이후 당당히 국제도시로 변모했다. 내가 공부했던 조지어 택 캠퍼스 안에 올림픽 선수촌이 지어졌으며 지금은 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인 인구도 많아 인천에서 이곳까지 오는 비행기에 빈자리가 없었다.

비행장 지하의 전철 남쪽 역에서 내려 라이언을 만나기로 되어 있다. 5일 예정으로 오니까 가방 하나, 라이언과 캐슬린, 그리고 아기에게 줄 선물만은 명심하고 챙겼다. 그 애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뿌듯하나, 라이언이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불안하다. 사람이 죽고 나서야 겨우 찾아오는 나, 그가 처음 이-메일을 보냈을 때 연락조차 하지 않았던 나였다.

남쪽 역에서 내려 라이언에게 휴대폰으로 전화한다. "나 지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갈 거야."

"오케이."

잔잔하고 확실한 대답, 지금까지 이-메일로 서로 연락했으므로 처음 들어보는 음성이다.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며 위를 쳐다보니 아기를 안은 젊은 남자가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다. 서로 간의 교감이라고 할까? 안고 있는 아기가 아니더라도, 또 손에 들려 있는 전화기가 아니더라도 나는 알았을 것이다. 손을 흔드니 라이언도 알은 체한다.

우리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만났다. 라이언은 서양인에 더 가깝다. 갈색 머리. 초록빛 눈, 그리고 나보다 더 큰 키, 살결은 백인에게서 보는 창백한 흰 살결이 아니라 동양인과 백인 혼혈에서 흔히 보는 상아빛이다. 준수한 용모에 마른 편이고 눈빛이 잔잔하다. 덜렁대지 않고 행동에 흐트러짐이 없다. 사람들은 나에게서 그런 인상을 받는다고 했다.

"아기 이름이 에디라고?"

"네, 한 살 반이에요."

에디는 엄지손가락을 빨며 다른 손은 아빠의 목을 꽉 잡고 있다. 작은 손이 터질 듯 젖살이 올랐다. 빨간 셔츠에 청바지를 입었는데 바짓가랑이가 당겨 올라가 통통한 다리가 정강이까지 노출되어 있다. 숱이 적은 금빛 머리카락이 피부에 찰싹 들러붙어 있다. 나는 아기를 만져보고 싶고, 또 바짓가랑이를 내려주고 싶으나 참는다. 지금까지 남의 아이들을 봤지만, 이토록 귀엽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에디의 얼굴을 보니 바로 돌아가신 모친의 모습이라, 마치 나 자신을 보는 것 같다. 우리를 닮았다는 것이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구나. 왜 귀하지 않겠는가? 첫 손자인데.

라이언이 자동차 트렁크에 내 가방을 싣는 동안, 나는 에디를 카시트에 앉히고 벨트를 고정한 후 그 옆에 앉는다. 낯선 사람을 보고 울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데 손가락을 빨며 나를 쳐다보고 씩 웃기까지 한다. 메기의 따뜻한 성격을 닮았나 보다. 한국서 가져온 폭신한 베이지색 아기 곰을 손가방에서 꺼내 주니까, 빨던 손가락을 얼른 빼고 두 손으로 덥석 받는다.

라이언이 운전대를 잡으며 묻는다. "오늘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있으세요? 어디든지 모셔다 드릴게요. 일요일이라 시간이 있습니다."

"왓슨 밀 다리에 가고 싶은데."

"좋아요. 캐슬린이 이번 주말 당번이라 제가 아기를 봅니다. 우유랑 기저귀도 충분해요."

우리는 애틀랜타 시내를 빠져나와 I-85 고속도로 북쪽으로 달린다.

"캐슬린은 무슨 일을 하니?"

"간호사입니다. 저는 컴퓨터를 공부했고요."

"아기 키우며 내외가 바쁘겠구나."

"요새같이 경기가 나쁠 때 직장이 있는 것만도 고맙지요."

에디가 곰을 떨어뜨리고 "얘에……"하면서 손가락질한다. 곰을 집어주며 나는 기어이 아기의 다리를 꽉 잡아본다. 터질 듯 보드라운 그 감촉을 음미하고 있는데 라이언이 백미러로 그러는 나를 훔쳐본다.

"우유 먹을 시간입니다. 가방을 열어봐요."

에디는 아기 곰을 나에게 맡기고 우유병을 두 손으로 꽉 잡더니 힘차게 빨기 시작한다. 만족한 듯이 다리를 흔들거리면서.

"어머니가 에디를 아주 귀여워했겠네."

"그럼요. 엄마에게 희망을 주었어요. 에디가 태어나서 일 년 동안 엄마는 정말 행복했어요. 그러다가 왼쪽 유방에 붉은 반점을 발견하였지요. 엄마의 암은 희귀한 급성이었습니다. 우리가 알았을 때는 벌써 마지막 단계까지 갔더군요."

50세에 세상을 떠나려고 메기는 그토록 성급하였던가? 그녀는 우리 관계에서 항상 나를 이끌었다. 그러나 결국 하나가 될 수 없었던 우리였기에 귀국할 때쯤 나는 그녀에게 냉정했다. 비겁한 줄 알았지만, 우리 두 사람을 위해 그래야만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모친과 내 가족이 있는 한국에 가야 했으며, 메기는 자기 인생을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라이언과 에디를 보니, 메기가 어렵던 시절에 도와주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그때는 아내와 사회가 두려웠다. 또 30년 전에는 한국이 가난하여 미국으로 송금하기도 어려웠다. 그리하여 나는 내 아이를 메기의 가냘픈 손에 맡겼고 풍문으로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다. 라이언이 양부(養父) 이야기를 할 때는 표정까지 부드러워진다. "우리 아빠가 계셨더라면 엄마를 잘 보살폈을 텐데……"라고 하면서.

뻐꾹 뻐꾹, 뻐꾸기는 산란기가 되면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 자신보다 작은 새가 알을 품고 있으면 우는 소리나 둥지의 형태를 잘 관찰하여 새끼가 자라기에 적당한 환경이라 생각되면 어미 새가 잠시 나간 틈을 타서 남의 보금자리에 있는 알을 한 개 땅에 떨어뜨리고 가장 따뜻하고 안전한 가운데 자리에 제 알을 낳고 떠난다. 작은 새는 그것을 제 알인 줄 알고 열심히 품어 부화시켜 먹이를 물어다 주며 기른다. 뻐꾸기는 산란기에 12-15개씩 알을 낳는데 남의 둥지에 제 알 한 개씩만 맡기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내가 바로 그렇게 새끼를 남에게 맡겨 기른 얌체였다.

에디가 젖병을 떨어뜨리며 잠이 든다. 동양인에 가까운 코, 둥그스름한 볼, 파란 눈을 감으니 에디는 영락없는 우리 아이다. 딴 아이들과 섞어놓아도 쉬이 알 것 같다. 라이언이 운전하는 동안 잠든 에디의 머리를 내 어깨로 받쳐준다. 내가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언제였던가? 그런 때가 있기나 했던가? 에디의 달콤한 젖 냄새를 맡으며 나는 행복감에 젖는다.

우리는 드디어 왓슨 밀 다리에 왔다. 70미터나 되는 긴 다리에 지붕이 덮여 있는 모양이 눈에 익다. 조지어 주에서 지붕 덮인 다리 중에 가장 길며 미국 전역에서도 몇 번째라고 메기가 옛날에 말했었지. 우리가 탄 차는 지붕과 벽에 가려 어둠침침한 다리 위를 덜컹거리며 지나간다. 저 멀리 끝에 보이는 햇빛 밝은 곳을 향해 가다가 갑자기 밝아지더니 오른쪽 강기슭에 조그만 주차장이 나타난다.

"여기서 에디와 내리세요. 주차하고 갈게요."

카시트를 풀고 에디를 안으니 잠을 깬다. 차에서 내리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나를 믿어서인지 에디는 울지 않는다. 아이를 안고 길을 가로질러 강기슭에 있는 풀밭으로 간다.

다리의 유래가 적힌 표지판이 보인다. 19세기 말, 물레방아와 목재소가 강가에 있어 물자수송을 위해 강 위에 다리를 건설했다. 지붕을 덮은 이유는 다리의 침목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전기가 이 시골까지 들어와 물레방아 동력이 필요 없게 되었다. 시설은 한동안 버려져 있다가, 현재 위치로 옮겨져 물레방아와 다리를 보수했다고 한다.

"미안해요, 당신한테 이렇게 잔인한 고백을 하게 되어,
오랜 세월 괴로웠소. 이젠 학교에서 은퇴하겠소.
그리고 미국에 며칠 다녀오겠소."


지금 이 다리는 1,000에이커가 넘는 방대한 공원의 중심이 되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30년 전 내가 처음 보았을 때는 갓 보수하여 새 재목으로 지붕을 얹었는데, 지금은 나무에 연륜이 쌓여 짙은 고동색으로 더욱더 장중하고 역사에 걸맞은 모습이 되었다.

그 긴 다리와 폭포를 배경으로 빨간 티셔츠에 앙증맞은 청바지를 입은 에디가 웃으며 넓은 풀밭을 쫓아다닌다. 라이언이 이쪽으로 걸어온다. 낡은 청바지에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잔잔한 눈빛, 우뚝한 코, 쉬이 가까이할 수 없는 예리한 인상을 준다. 비행장에서 본 첫인상과 같이 행동거지에 흐트러짐이 없다. 에디가 제 아비를 보고 쫓아가서 안긴다. 에디는 우리 어머니 모습과 메기의 성격을 닮았고, 라이언은 나를 닮았다. 에디는 나를 쉽게 받아들이는데, 라이언은 다르다.

"라이언, 강가를 좀 둘러볼게."

"그러세요. 마음 놓고 천천히 둘러보고 오세요."

나에게 원망스러운 감정이 있겠지만, 라이언은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구질구질하기 싫은 자존심, 너는 너, 나는 나 하는 미국 아이들의 분명함이며 냉정함이기도 하다.

폭포를 지나 강 상류로 올라가니 물결이 잔잔하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강물 위에 쓰러져 있던 곳은 어디쯤일까? 우리는 강물에 드리워진 나무둥치 위를 조심조심 걸어갔었지. 마주 보며 걸터앉아 모친이 삯바느질하며 가난하게 자란 내 과거를 이야기했다. 메기 앞에서는 언어가 문제되지 않았고 이야기가 쉽게 풀려나왔다.

처음에는 영어회화 연습하기 위해 메기를 자주 만났다. 그녀는 늘 내 발음을 고쳐주었고 반복시켰으며 어색한 표현을 지적했다. 다행히 메기 어머니가 미국 동부 출신으로 교육을 받은 분이라, 모녀는 남부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내가 지금 이만큼이라도 영어를 하는 것은 순전히 메기 덕택이다.

그때 쓰러졌던 그 나무둥치를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선다. 그것이 아직도 거기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으니까 서운하다. 강가를 거닐다 오니까 라이언이 풀밭에 타월을 깔아놓고 에디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있다. 일회용 젖은 수건으로 사타구니를 꼼꼼히 닦아준다. 내가 저토록 정성스럽게 내 아들 진수를 돌봐 준 적이 있었던가? 통통한 두 다리 사이에 있는 예쁜 고추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라이언, 엄마 묘지에 한번 들렀으면."

"여기서 멀지 않아요."

우리는 침례교회 뒤에 있는 묘지에 왔다. 묘지라야 평평한 땅에 메기 존즈 (1959-2009)라고 새긴 작은 동판 한 개다. 태어난 해를 내려보며 새삼스럽게 메기가 너무나도 일찍 가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라이언이 만든 장례식 프로그램조차 "날 그리워하되, 떠나게 해줘."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교회가 바로 장례식을 치른 곳이구나."

"네, 그래요."

우리는 계단을 올라가 육중한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간다. 라이언이 보냈던 장례식 프로그램을 생각하며 앞자리에 가서 나도 모르게 성당에서 하듯 무릎을 꿇는다. 30년이 넘는 세월, 잊으려고 무한히 노력했고 그래서 잊고 살았다. 그러나 라이언과 에디를 눈앞에 보니, 그 애들이 바로 나의 현실인데 잊으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던가? 물론 한국에서 배신감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아내도 나의 현실이다. 착잡한 마음으로 교회를 나오는데, 라이언이 말한다. "엄마가 살던
집도 여기서 가까워요."

나는 다시 라이언에게 정신을 집중하며 대답한다. "그래, 가보자."

"팔려고 내놨어요."

"그렇게 해야지.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어느덧 우리는 부동산 세일 푯말이 서 있는 집 앞에 왔다. 소박한 단층집, 대지
가 넓고 뒤에 숲이 있는 집, 옛날에 내가 왔던 바로 그 집이다. 모친으로부터 물려받았구나. 가을 햇볕에 양지바른 거실이 눈에 익다. 고객에게 언제라도 보여줄 수 있도록 집은 말끔히 정돈되어 있다. 여기서도 라이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좁은 아파트에 살다가 이곳에 오면 에디가 아주 좋아해요. 여기에는 엄마와 제가 쓰던 장난감이 있거든요."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에디는 장난감 상자 쪽으로 쫓아간다. 라이언이 나무로 만든 강아지를 꺼내 단추를 누르니까 음악 소리가 나면서 아장아장 걸어간다. 신나게 강아지를 따라다니다가, 음악이 멎으며 거실 한가운데에 뚝 서니까, 에디가 나를 끌고 가 단추를 누르라고 시늉한다. 라이언이 부엌에서 떨그럭거리는 동안 나는 에디와 논다. 한 살 반짜리지만 눈치가 있고 붙임성이 있다.

라이언이 점심 준비가 되었다면서 오라고 한다. 나무로 된 하이체어는 자기가 어릴 때 쓰던 것이라며 에디를 거기에 앉힌다. 라이언이 따끈한 피자를 찬 콜라와 함께 내놓는다.

"피자가 웬 거냐? 먹을만하구나."

"냉동에 있던 것을 오븐에 구웠어요."

어느새 자기 몫을 다 먹은 에디가 "모아(more)" 하면서 일회용 접시를 내민다.
'모아'라는 말을 배웠구나. 내가 웃으면서 조그맣게 잘라 접시에 담아준다. 이 아
이를 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

"이 집은 얼마나 받을까?"

"11만 불에 내놨는데 통 소식이 없네요. 경기가 나빠서."

한국 돈으로 1억 좀 넘는구나. 시골집이라 그렇구나. 어서 이것을 팔아 애틀랜타에 있는 집을 하나 샀으면 좋으련만. 좁은 아파트에 산다니 군색해 보인다. 집 장만하는데 보태주고 싶으나 미국 아이들의 독립심을 생각하면 라이언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말 한마디라도 조심해야 할 처지인데, 거절할 것을 알면서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초면에 그런 말을 하면 라이언이 모욕을 느낄 것이다.

점심 후, 라이언이 집을 보여준다. 메기가 쓰던 침실에는 퀸사이즈 침대가 아직도 그대로 있고 작은 탁자 위에는 메기 내외의 결혼사진이 놓여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메기와 중년이 훨씬 넘어 머리가 희끗희끗한 미스터 존스, 아버지와 딸 같다. 라이언의 어릴 때 사진이 여러 장 탁자 위에 진열되어 있고 에디 사진도 있다. 얼굴이 몇 번씩 바뀐다고 하더니 라이언이 어렸을 때는 통통하게 살이 쪄서 지금 에디와 같았구나. 라이언이 나를 작은 방으로 인도한다.

"이 방은 엄마가 처녀 시절에 쓰던 방이에요."

창문을 통해 숲이 보인다. 그래, 이 방이지. 내가 처음 여기 왔던 날,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나서 메기가 이 방으로 살며시 나를 데리고 와서 나에게 매달리며 첫 키스를 하던 곳. 그때를 생각하니 온몸이 나른해진다.

오후에 애틀랜타로 돌아왔다. 예약한 호텔로 데려다 주면서 라이언이 말한다. "내일은 제가 좀 바빠요."

"월요일이니 당연하지. 나는 옛날 친구를 만나면 돼. 이곳에 계속 눌러앉아 사는 친구가 몇 있거든."

"목요일에 떠나신다고 하셨죠? 그전에 제가 들를게요. 화요일과 수요일은 낮에도 시간이 있어요. 필요하시면 아무 때나 연락하세요."

캐슬린을 만나고 싶으나 라이언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니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다.

목요일, 인천행 대한항공이 11시 55분에 출발한다. 시간이 넉넉하여 라이언과 나는 공항 내의 맥도널드에서 아침 커피를 나눈다.

"커피 맛 좋은데."

"그럼요, 맥도널드 커피라고 무시할 게 아녜요. 스타벅스 커피는 비싸기만 하고
너무 진해요. 저는 이게 더 좋아요."

같은 것을 좋아하고 공통점을 발견하며 서로 이해하는 과정이구나. 오늘 라이언은 내가 한국서 가져온 주황색 소매 긴 셔츠를 입고 있다. 나의 기분을 생각해서 그 옷을 입고 나온 이 미국 아이의 예의라는 것을 안다. 오기 전에 롯데 백화점에서 샀는데 라이언의 피부 색깔에 맞는다. 특이한 색깔로 메기가 저런 셔츠를 내 생일에 사주면서 번트 오랜지(burnt orange)색이라고 말했다. 오렌지를 태운 색깔? 했더니 그녀가 웃었다. 여러 해를 그녀 생각하며 입었는데 내용을 모르는 아내는 나한테 어울리는 색깔이라고 했다. 아내가 괴로워하고 있을 때, 나는 이 식
구들의 선물을 사겠다고 백화점을 몇 군데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어제는 애틀랜타 시내 한국 식당에서 점심으로 갈비 정식을 나누며 우리 집안 얘기를 했다. 라이언이 묻기를, "당신의 아버지는 왜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까?"

"당신의 아버지"라는 호칭에 움찔하였으나,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해줬
다. "장 티푸스로 돌아가셨는데, 살모넬라 타이피 균에 의한 전염병이라 유전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야."

라이언이 안심하는 눈치였다. 에디의 아비로서 중요한 질문이었고, 또 나를 만나려는 이유였다. 떠날 시각이 가까워 온다. 라이언이 손목 시계를 보며 말한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미룬 것이 후회돼. 너와 엄마한테 미안해."

"다 지나간 일이에요. 지금 와서 원망하지 않아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

"이 사진은 엄마가 한 번씩 꺼내보던 것인데, 인제는 돌려 드리고 싶어요."

라이언이 가방에서 은색 액자 한 개를 꺼내어 나에게 준다. 메기가 왓슨 밀 공원에서 찍은 컬러 사진인데 내가 등산 조끼를 입고 숲을 배경으로 웃고 있는 사진이다. 지금과 같이 단풍이 찬란하던 계절에 찍었으며 인물 위주라 나의 모습이 잘 나온 것이다. 숱이 많은 검은 머리, 주름살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 지금 라이언과 같은 나이였다. 빛나는 젊음, 나도 이런 때가 있었구나.

나는 사진을 그에게 내민다. "네가 가지렴."

"괜찮아요."

내 사진을 간직할 의사가 없다고 한다. 나의 손이 무안하게끔 그것을 받지 않는다. 라이언이 "다 지나간 일이에요. 지금 와서 원망하지 않아요."라고 했다. 그 말은 나를 너그러이 봐준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애착이 없다는 밀이기도 하다. 나는 그들 모자가 도움이 필요할 때 외면했다. 무슨 애착이 있겠는가? 제 새끼를 위하여 주로 유전적인 측면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을 뿐이다.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사무적으로 나를 대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이제야 찾아온 나, 그는 나를 믿지 않는다. 일정한 거리에서 나를 관찰하려는 것 같다. 우리 사이에는 큰 강이 가로막혀 있다. 그 위에 다리가 지나가고 있으니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일까? 게다가 침목이 썩지 않게끔 그 긴 다리 위에 지붕이 덮여 있지 않은가? 기다려 보자. 시간이 약이라고 했다.

수상 소감

"늦었지만 작은 결실을 보여드립니다"


저의 어머니 생전에 너는 어째서 단념할 줄 모르느냐고 하셨습니다.

직장 일에 쫓겨 주부 노릇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글까지 쓰겠다고 하는 딸이 보기에 안타까우셨겠지요.

아버지, 어머니, 두 분께서 이제 모두 돌아가셨지만, 위에서 내려다보시리라 믿어요. 좀 늦었지만 이제야 작은 결실을 보여드립니다.
컴퓨터 앞에서 미련하게 세월을 보내는 아내를 인내심 있게 기다려 준 남편,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그 결과를 보여줄 수 있군요.

심사위원 여러분, 감사합니다. 더 잘해보라는 격려로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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