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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셔 플레이스] 김영옥과 '명예훈장'

박용필/논설고문

김영옥 대령과 관련한 에피소드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그의 인종을 초월한 꼿꼿한 태도다.

1943년 소위로 임관한 김영옥이 배치를 받은 곳은 뜻밖에도 442부대였다. 전원 '니세이(2세)'로 편성돼 '미국 속의 일본'이나 다름없었다. 동양인이 백인을 지휘할 수 없다는 군 지도부의 방침에 따라 한국계 장교를 니세이들 틈에 끼어넣은 것이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를 알고 있던 백인부대장이 타부대 전출을 강요했다. 김영옥을 배려하는 척 했지만 실제는 전투력 약화 우려 때문이었다. 니세이 병사들이 한국계 장교의 지휘에 따르지 않을 것은 뻔했다.

김영옥은 부대장의 전출 명령에 단호히 맞섰다. "이 부대에 한국인과 일본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아메리칸이다. 함께 공동의 적과 싸울 뿐이다."



그의 이같은 발언이 알려지자 그제서야 병사들은 그를 따르고 존경하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에선 김영옥을 '여럿이 모여 하나(Out of Many One)'라는 미국의 건국이념에 가장 충실했던 군인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의 리더십은 유럽 전선에서 빛을 발했다. 연합군의 로마 해방에는 김영옥의 공이 컸다. 당시 미군은 독일의 막강 전차부대가 주변에 포진해 있을 것으로 짐작해 작전을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결사대를 조직해 독일군 포로를 잡는데 성공한 김영옥은 심문 결과 탱크부대가 없다는 사실을 상부에 알렸다. 미군은 곧바로 총공격을 감행해 로마를 함락시키는 대 전과를 올렸다.

김영옥은 일본계 커뮤니티에서 인종편견과 차별에 강하게 맞선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LA의 리틀도쿄에 세워진 442부대 추모탑은 그가 주도해 만든 조형물이다. 비문의 전면에는 적성국 시민으로 간주돼 수용소에서 지내야 했던 니세이들이 어떻게 참전했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작성자는 벤 타마시로. 초안을 작성해 옛 상관인 김영옥에게 감수를 부탁했다. 김영옥은 딱 한 단어를 고쳤다. '억류(internment)'를 '강제수용(concentration)'으로 바꿨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집단수용 처형했던 캠프에 빗대 당시 미국의 차별정책에 항거한 것이다. 이 사실은 2004년 타계한 타마시로의 부음기사에 실려있다. 하와이 신문이 타마시로의 딸을 인용 보도해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6.25전쟁이 터져 한국행을 자원한 김영옥은 백인들을 지휘한 최초의 동양인이라는 또하나의 기록을 미국 전쟁사에 남겼다.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지은이 한우성)의 영문판(옮긴이 장태한) 발간에 맞춰 주류사회에 김영옥 알리기 캠페인이 펼쳐지고 있다.

김영옥과 관련해 아쉬움이 남는 것이 한가지 있다. 그가 치열하게 목숨을 내걸고 싸웠던 나라들에선 최고의 무공훈장으로 보답했지만 정작 '그의 조국'은 인색했다는 점이다.

지난 2000년 442부대 출신 20명에게 군인 최고의 영예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이 추서됐으나 웬일인지 김영옥은 그 명단에서 빠졌다. '거덜날 때까지 간다(Go for Broke)'는 442부대의 전투구호다. 니세이들의 놀음판에서 비롯된 말로 우리말로 옮기면 '판돈을 몽땅 잃을 때까지'다. 화투판의 '못먹어도 고'라고 할까.

부대의 슬로건대로 인종화합에 온몸을 내던지고 차별엔 거칠게 항의했던 김영옥의 영전에 명예훈장을 바치지 못한다면 지금 세대는 떳떳지 못한 후손들로 이민사에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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