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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소주병에서 만나는 붓글씨

이종호/논설위원

대학 때 서예회 활동을 하면서 잠시나마 지필묵의 세계를 경험했었다. 별로 잘 쓰진 못했지만 전서.예서.행서가 무엇인지 또 구양순과 안진경이 어떻게 다른지 구분할 수 있는 정도의 눈은 그 때 떴다.

서예회에 발을 들이민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그 때도 전국학생휘호대회라는 게 있었다. 선배들을 응원한답시고 얼떨결에 따라 나갔는데 뜻밖에도 입선을 했다. 대단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또 내 실력으로 어떻게 '선(選)에 들 수' 있었는지 수긍이 되진 않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때 나는 알아버렸다. 이런 대회의 심사라는 게 얼마나 즉흥적이고 졸속이라는 것을. 그리고 주최측과의 연줄과 안면이 심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그리고 훨씬 나중의 일이지만 그런 휘호대회 뿐 아니라 유수의 서예전 그리고 우리 사회의 수많은 공모전 선발전의 상당수가 음험한 뒷거래에 물들어 있더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요즘 한국 서예계가 미술대전 서예부문 수상작 자격 시비로 떠들썩하다. 이를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레퍼토리인지 믿기지가 않았다. '줄 세우고 돈 오가고…추사 김정희도 청탁없인 떨어진다'라니. 기사 그대로 특정인 밀어주기 오탈자 작품 뽑기 입선자 명단 나돌기 3초 졸속 심사 등은 30년 전에도 똑같이 듣던 소리였다.



거기다 뜻도 내용도 모르면서 글자 모양 베끼기에만 급급한 연습 과정 잘 읽지도 못하는 어려운 한자를 나열해 놓고 작품이라며 내어 놓는 일 등의 풍토도 그대로였다. 하긴 그 때 이미 이런 상태로는 더 이상 서예의 미래는 없다며 많은 사람들이 결론을 내렸지만.

그러나 최근 몇년 새 의외의 영역에서 새로운 모습의 서예를 만나고 있음은 예상 밖이다. 영화 포스터나 드라마 제호 책 표지 광고는 물론 기업 로고에 이르기까지 생활 속에서 폭넓게 이용되고 있는 한글 붓글씨가 그것이다. 여기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으로 유명한 성공회대 신영복 석좌교수다.

그는 20년 감옥 생활 동안 연마한 붓글씨가 수준급이었다. 2006년 한 소주회사가 그가 쓴 '처음처럼'이라는 글씨를 상표로 쓰게됐다. 그러면서 1억원의 장학금을 내놓았는데 이 일은 손글씨의 가치를 일깨운 하나의 사건이 됐다. (그 소주는 출시 5년만에 18억병이 팔렸다. 경쟁사인 다른 소주회사도 글씨예술가 강병인이 쓴 '참이슬'이란 손글씨로 상표를 다시 디자인했다.)

그러나 이렇게 디자인과 접목된 글씨는 서예라 하지 않고 캘리그래피(Calligraphy)라고 한단다. 명칭이야 어떻든 캘리그래피의 유행은 서예의 현대화 대중화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서예의 본질은 외적인 조형미보다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출하는데 있다고들 한다. 얼마나 매끈하게 잘 쓰는가가 아니라 자기답게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요즘은 디지털 활자 시대이다 보니 서예는 고사하고 편지글 한 장 내 필체로 쓸 기회가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서예를 하는 것은 왜 일까.

그것은 여전히 남아 있는 서예 정신에 대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선비다운 지조 세속에 물들지 않는 깨끗함 그리고 절제와 절개. 하지만 이런 것들도 세상과 소통하지 않는 자기 만의 것이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도 서예 단체들은 30년째 자신들 만의 틀 속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어떡하면 좋을까. 세상은 달라지고 서예라는 이름조차 캘리그래피라는 영어로 은근슬쩍 바뀌어가고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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