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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였던 '나' 죽이는 일은 전쟁…800명 교인도 나에겐 전쟁 사역

[LA중앙일보] 발행 2011/07/13  2면 기사입력 2011/07/12 16:54

가수 출신 이종용 코너스톤 담임 목사

인터뷰 사진은 이종용 목사의 장남 철호(25)씨가 찍었다. '가수 이종용'은 본인에게는 옛 추억이었지만,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아들에게는 자랑스러운 현재였다. 기사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만들었다.

인터뷰 사진은 이종용 목사의 장남 철호(25)씨가 찍었다. '가수 이종용'은 본인에게는 옛 추억이었지만,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아들에게는 자랑스러운 현재였다. 기사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만들었다.

-세시봉 시대 대표 가수다.

"엄밀히 말해 난 세시봉 출신이 아니다. 무교동에 세시봉이 있었다면 종로 YWCA에는 '청개구리의 집'이 있었다. 난 거기서 '사랑해'를 불렀고 김민기는 '아침이슬' 김도향의 투코리안스는 '벽오동'을 불렀다. 그 다음이 양희은 서유석이었다."

-지금 부는 세시봉 열풍이 부럽지 않나.

"얼마전 방송에서 이장희씨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나도 오히려 지금이 행복하다. 세상의 인기는 잠시 드러나는 것 뿐인데 나는 생명을 구하고 있지 않나."

-세시봉 열풍을 평가한다면.

"좋은 바람(風)이다. 그전까지 아이돌 그룹들이 마치 한국 가요계 전체를 대표하는 양 비춰졌다. 무대는 풍성해야 한다. 세시봉 열풍은 풍성한 문화으로 가는 첫발을 내딛게 했다."

-윤형주씨가 31일 코너스톤 교회에서 단독 공연을 한다.

"인연이 각별하다.(그는 '형주 형'이라고 불렀다.) 동료 가수이기도 하지만 구치소 동기이자 신앙의 동반자다. 120일 동안 차가운 감방에 있으면서 함께 신앙을 되찾았다. 벌써 36년전 사건이다."

-지금 젊은 세대는 '그 사건'을 잘모른다.

"75년 12월3일이다. 연예인 200여명이 줄줄이 붙잡혀 들어갔던 대마초 사범 일제단속의 구속 1호가 나 윤형주 이장희(라디오코리아 전 대표)였다."

-한참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이다.

"체포된 날 8개월 연속 1위 가수로 황금 트로피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상 대신 수갑을 찼다. 대마초를 피우지 않았던 내게는 '공급책'이라는 죄명이 붙었다. 지금은 자숙의 기간을 거치면 다시 무대로 복귀할 기회라도 있지만 당시 마약사범은 가수에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재기했나.

"4년간 출연금지 조치를 당했다. 그러다 79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주인공 예수역을 맡게됐다. 당시 처음으로 흑자를 낸 뮤지컬 공연으로 연일 흥행을 이뤘다. 윤복희 최주봉 유인촌 곽규성이 함께 출연했다. 그때 무용수였던 탤런트 박상원은 막내로 나중에 합류했다."

-그 무렵 겨울아이도 유행했다.

"81년 취입했다. 곡이 인기를 끌때 정작 나는 한국에 없었다. 언론에서 '얼굴없는 가수'의 원조라고 하더라. 82년 목사가 되기위해 미국으로 건너왔다."

-왜 목사가 되려했나.

"79년부터 81년 12월까지 만 2년간 249회 수퍼스타를 하는 동안 예수에 젖어 살았다. 무대에서 예수 이상 가는 역할이 어디있겠나. 예수의 큰 사랑에 녹았다. 다른 것은 재미 없어지더라."

-가수 이종용의 '너'와 목사 이종용의 '너'는 어떻게 다른가.

"가사대로라면 너는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노래다. 그래서 목사가 된 뒤에는 일절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생각이 바뀌었다. 노래에는 '나를 위해 기도하던 너'라는 구절이 있다. 생각해보면 그때(가수시절)나 지금이나 '너'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셨다."

-가수 출신이어서 목회가 쉬웠을 것이라고들 한다.

"그렇게들 알고 있지만 사실 전혀 아니다. 오히려 마이너스였다. 보통 대중은 연예인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존경하지는 않는다. 우리 교회에도 나를 구경온 사람들은 많았지만 나와 이 전쟁을 같이 하겠다는 교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목회가 전쟁처럼 치열했나.

"연예인과 목사는 성향이 정반대다. 연예인은 어떻게든 자기를 드러내 각인시켜야 살아남는다. 반면 목사는 날마다 죽어야 산다. 나는 빠지고 하나님과 성도들만 드러나야 한다. 가수였던 내게는 나를 죽이는 일이 전쟁과도 같다. 지금도 그렇다."

-LA에서 개척한 지 18년째다.

"텍사스주에서 85년 교회를 개척해 8년반 동안 섬기다가 93년 LA로 건너왔다. 당초 한국으로 안식년을 떠나려했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몇몇 젊은 형제.자매들이 '왜 이제 오셨나요'하고 눈물을 흘렸다. 마음이 찡해져 겁없이 덜컥 '개척하겠다'고 약속했다."

-18년된 교회에 교인수가 800명이다. 부흥한 교회라고 말하긴 어렵지 않나.

"800명도 내겐 전쟁같은 사역이다. 성경에 교인 수가 교회의 부흥이라는 말은 없다. 목회자의 임무중 하나가 '성도를 온전하게하라'는 것이다. 800명 교인 한명 한명이 온전한 삶을 살도록 보살피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내 분량에는 넘치고 벅찬 축복이다."

-가족 얘기를 해달라.

"서른 여섯 늦은 나이에 아내와 결혼했다. 아내는 할아버지가 한국 감리교 초대 목사였던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난 재일교포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큰 아들은 이듬해 첫 결혼기념일 결혼식을 올리던 시간에 태어났다. 우연이 아니다 싶다. 큰 아들은 6살부터 목사가 되겠다고 하더니 지금 신학교를 다니고 있다. 작은 아들과도 친구처럼 지낸다."

-목사로서 꿈은.

"목사가 내 꿈을 꾸면 되겠는가. 하나님의 꿈을 항상 구해야 한다. 처음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의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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