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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93세 청년의 외침, "분노하라!"

이은미/미드웨스트대 조교수  

“21세기를 창조할 사랑스런 젊은이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창조한다는 것은 저항한다는 것이며, 저항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라고.”

 2차대전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으며,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에 수감된 적도 있고, 유엔 인권 헌장의 기초를 작성했던 프랑스의 사회 운동가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의 아주 짧은 책 한 권 ‘분노하라! (Indignez Vous!)’가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성난 사자처럼 우렁차게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나는 ‘Time for Outrage!’라는 제목의 영문 번역서를 구해서 읽어보았는데 삼복 더위에 폭포수를 맞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제목 그대로 스테판 에셀은 독자들에게 ‘분노하고, 저항하라’고 역설한다. 그에게 분노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가치를 지키기 위해 분노해야 하는가?

 유태인으로 나치의 학대를 당했던 에셀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에 행하는 폭력에 분노한다. 압제를 받았던 자가 약자를 짓밟은 압제자가 된다면 그 역시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그는 보는 것이다. 경제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부자는 더욱 소유를 증가시키고 못 가진 자는 더욱 기초 생존권을 박탈당하는 사회구조에 그는 분노한다. 누군가가 기초적인 인권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거든 그가 최소한의 인권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는 도와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것이 그에게는 분노와 저항이다.



 저항의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사회정의 실천을 위해서는 폭력도 불사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이 93세의 청년은 깊은 고민의 과정을 거친 듯 하다. 그는 “어떤 형식이건 폭력으로 이루어진 것은 실패에 불과하다”는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폭력을 중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비폭력’이며 비폭력이 인류의 역사에서 ‘비폭력적 희망’을 유지시킬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에게 있어서 ‘폭력이란 희망에 등을 돌리는 행위’인 것이다. 그는 ‘저항’을 역설하지만 동시에 ‘비폭력’을 강조한다.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를 선정, 발표하며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는 각계 인사들을 격려하는 노르웨이에서 최근에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아직 배후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알려진 바로는 이슬람 문화에 적대적인 노르웨이 사람이 다문화적인 것에 관용적인 사회적 분위기에 반감을 품고 백 여명 가까운 사람들을 살상하는 사고를 저질렀다고 한다. 이 범행의 배후가 누구인지, 단독 범행인지 조사가 진행되어봐야 알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의 행동이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폭력은 희망에 등을 돌린다.

 그렇다면 나는 개인으로서 무엇에 분노하고 저항해야 하는가? 에셀은 눈을 뜨고 문제를 들여다 보라고 제안한다, 그것이 시작점이라고. 그런데 그것이 쉬운 일일까? 우리는 눈을 뜨고 있다고 해서 주변의 현상을 모두 보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눈을 뜨고도 못 보거나, 두 눈 뜨고 보면서도 외면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스텐리 코언 (Stanley Cohen)의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에 이런 ‘외면’의 사례들이 많이 소개가 된 바 있다.

 가족 중에 힘없는 아동이 성적인 학대를 당할 때 ‘설마 우리 식구가 그럴 리가 없어’라고 외면하는 일은 아동 성학대의 현장에서 비일비재하다. 눈 앞에 일이 일어나도 못 보거나 안 본다. 전철에서 누군가가 행패를 부릴 때 이를 나서서 말려주는 대신에 그 자리를 피해버리는 일은 나 역시 저지르는 일이 아닌가? 나는 왜 분노하지 않는가? 나는 왜 저항하지 않는가? 나는 왜 나서서 “그러지 마세요”라고 말하지 않는가? 나는 왜 희망에 등을 돌리고 모르는 척 하는가?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가 고통 당하고 있을 때 그의 고통을 직시하고 도우려는 몸짓을 하는 것이 사회 구성원의 임무다. 그것이 에셀이 말하는 분노이며 평화적 저항이다. 그것이 희망의 역사를 창조하는 방법이다.

 나는 최근 93세의 청년을 만났다. 그는 내게 ‘분노하라’고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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