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문예 마당] 흐르는 세월

김외출/'수필과 비평' 등단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을지로 입구 역에 내렸다. 약속 장소에는 벌써 낯익은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60년대 초 나와 구직난의 아픔을 같이 겪었던 사람들이다. 그땐 1차 산업시대로 대부분이 농업에 의존하며 살아야만 했다. 농촌의 부모들은 소나 논밭을 팔아 자식을 대학에 보냈지만 기둥뿌리가 흔들리도록 뒷바라지해서 졸업을 시켜도 취업 할 수 있는 직장은 고작 학교 은행 관공서뿐이었다.

그 시류를 벗어날 수 없는 나도 어머니께 효도하는 방법은 공무원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총무처에서 처음 시행한 제1회 5급 행정(지금 9급) 고시에 응시했으나 실력이 부족한데다 경쟁률이 너무 높아 고배를 마시고 좌절의 늪에 빠져들었다. 와신상담 끝에 재도전하여 2회 때 겨우 턱걸이로 합격했다.

하지만 그땐 시험에 성공해도 총무처에서 5:1의 비율(성적순)로 각 부처에 추천을 하고 1년 안에 발령을 받지 못하면 자격이 취소된다고 했다. 나는 성적이 좋지 않은지 반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이러다가 자격이 상실되지 않을까 애타는 심정은 한양으로 떠난 이 도령을 기다리는 춘향이인들 이러했을까 싶었다. 7개월이 지나서야 K부처에서 반가운 소식이 왔다. 기쁨의 눈물이 가슴을 적셨다.

출근을 하고 보니 그 부처의 최초여성 공무원이었다. 수많은 남자 직원 중에 극소수의 여자 동기들은 인기 절정이었고 사내 결혼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생겼다.



그날 만난 분들은 7월 27일 K부처로 함께 발령을 받은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모임의 명칭을 7.27동기회로 정하고 그때가 마침 45주년 되는 날이라 자축하려고 만난 것이었다. 모두 아홉 명이 참석했는데 여성이 셋이었다. 어느 조용한 일식집에서 현직에 있을 때 일들을 회상하며 떠들썩했다. 그러나 젊었을 때 그 풋풋하던 모습과 열정은 세월 속에 묻히고 골 깊은 주름에 파뿌리 같은 백발의 초라한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게 바로 내 모습이기도 했다.

문득 재직 중에 곤혹스러웠든 일이 아슴푸레 떠올랐다. 내가 처음 발령받은 곳은 기획국 심사분석과였다. 3개월에 한 번씩 기관의 업무수행에 대한 분석을 평가하는 곳이라 한가로운 편이었다. 첫 출근 날 과장님이 한문이 잔뜩 쓰인 기안지를 내놓으면서 정서해서 직원에게 회람하라고 지시하셨다. 평소 한문을 읽을 때는 별로 어렵지 않았는데 쓰려고 하니 자신이 없어 난감했다. 한문 습자를 게을리 한 것을 자책하며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하여 1차 관문을 통과했다.

어느 해 3주일 동안 일반 공무원 교육을 갔다. 마치고 돌아오니 왠지 사무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뭔가 암송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와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고 그동안 밀린 일을 하다가 가만히 들어보니 중학교 때 남자 동창이 서울에서 취업이 안 되어 하향해 있으면서 써 보낸 편지였다. 나는 직원들의 무뢰한 행동에 화가 났지만 노총각들의 히스테리로 생각하고 애써 태연한 척했다. 평소 아기처럼 잘 우는 내 약점을 알고 작당을 한 것 같았다. 그렇게 짓궂게 굴던 그들이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고 싶다.

또 한 가지 나는 입사할 때 어머니와 한 약속을 평생 지키지 못했다. 일찍이 청상이 된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에도 삼 남매를 서울에 유학시키셨다. 입사만 하면 그동안 내가 쓴 학자금으로 논 세 마지기를 사드린다고 굳게 다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일찍이 사랑에 빠져 결혼하는 바람에 그 약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그 일은 아직도 내 마음밭 한 자락에 죄책감으로 남아 있다.

그땐 지금과 다르게 주부가 사회 활동하는 것은 탐탁지 않게 여기던 터라 내가 첫아기를 낳자 친정에서 양육 문제를 구실로 삼아 사표를 내라고 했다. 상사들과 동료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회사를 빨리 그만두게 되어서 살아가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울 땐 후회도 많이 했다.

세월은 어느덧 반세기가 흘렀다. 말단 공무원에서 시작한 이 친구들은 그동안 승진을 거듭해서 정년퇴임 할 때는 직위가 대부분 국장급이며 차관급에 오른 사람들도 있었다.

50주년에는 부부 동반해서 함께 외국여행을 떠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이미 종합병동 같은 몸으로 흥미 없는 눈치였다. 인간의 두뇌가 오늘의 과학문명을 발달해 삶이 편해지고 뭐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세월을 멈출 수 없는 자연의 순리 앞에 나는 숙연할 따름이다.

지난 송년 모임에서 봄이 오면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쇠락해 가는 옛 동료 모습에서 한 생에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보았다. 그들도 내 모습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무상한 것이 세월인가.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