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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태산에 가리운 투수 차동철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 십 리를 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한다면 산이 큰만큼 그 산으로 인해 덕을 많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그 큰 산으로 인해 주변의 산들은 볼품 없는 것이 되기 때문에 왠만큼 경치가 빼어나거나 아름답지 못하면 수양산 자락에 묻혀 빛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도 된다. 이 속담은 본래 어떤 사람이 크게 되면 그 주변의 친척이나 친구 친지들이 그의 덕을 입는다는 뜻이다.
 
해태 타이거즈에 선동렬이 있어 팀 전체로 볼 때는 득이 됐지만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득이 됐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왠만큼 잘해 가지고서는 선동렬에 가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 중 한 선수가 차동철 투수다.
 
차동철은 선동렬의 광주일고 1년 후배다. 그는 광주일고 2학년 시절부터 박노준, 김건우가 주축이 된 선린상고, 광주상고, 천안 북일고를 차례로 격침시킨 대물투수였다.
 
그러나 야구협회 관계자들이나 매스컴은 선동렬에게 더 많은 점수를 줌과 동시에 최우수선수상도 전게임에서 6회 이상 던져 승리 투수가 된 차동철이 아니라 선동렬에게 돌아갔다. 이 사실은 야구를 잘 안다는 팬들에게 많은 의구심을 낳게 한 미스터리로 아직까지 존재한다.
 


그래서 혹자는 매스컴이 선동렬을 너무 과대포장한 것이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틀린 말이 아닐 수 밖에 없는데 주요 경기에서 선발로 나와 6회 이상 던져 승리 투수가 되었다면 그가 2 학년생이라도 당연히 팀의 에이스는 차동철로 봐야 한다. 그러나 항상 승리의 영광은 선동렬의 차지로 돌아갔다.
 
구질의 다양성도 차동철이 한 수 위였다. 선동렬은 거의 직구 위주의 투구를 했지만 차동철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다양한 구질을 구사할 줄 아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투수였다. 차동철 본인으로서는 보통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단지 선동렬에게 뒤지는 면이 있다면 스피드뿐이었다.
 
다양한 구질 면에서는 다른 어떤 투수도 견줄 수 없는 투수였다. 동기생인 MBC 청룡의 김건우가 술 한잔을 사주면서 그에게 포크 볼을 던지는 법을 배웠고 선동렬에게도 한 수 가르쳐줄 정도로 다양한 구질의 소유자였다.
 
커브, 슬라이더는 기본이고 포크 볼(Forkball) 등을 던졌다. 특히 타자 앞에서 심하게 낙하하는 SF볼(Split Finger Fastball)은 해태에 있을 때 그가 개발해 한국 프로야구에서 제일 처음 던졌다. 이러한 재능을 가진 차동철은 항상 2인자로서 만족하면서 선수 생활을 하게 된다.
 
대부분의 팬들은 최동원과 선동렬이 벌인 15이닝 혈투만 기억한다. 하지만 1986년 7월27일 인천에서 벌어진 청보 핀토스의 재일동포 잠수함 투수 김신부와 차동철 사이에 벌어진 15회 연장 무승부 경기는 잘 모른다. 최동원과 선동렬의 경기는 점수를 주고 받았지만 차동철과 김신부가 펼친 대결은 15회까지 0의 행진으로 끝난 길고긴 명승부였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2인자로 선수 생활을 하면서도 해태에서 4년 연속 우승, 1990년 LG트윈스로 이적해서 2번의 우승까지 합쳐 차동철은 모두 여섯 개의 우승 반지를 손가락에 끼는 영광을 안았다. 그는 현재 모교인 건국대 감독으로 후배들을 지도하면서 차세대 프로야구 선수들을 기르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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