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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폭동 20주년] 액티브USA 이 돈 회장 '나는 이렇게 4·29 딛고 일어섰다'

"잿더미서 재기…세금보고 잘해 대출 혜택이 큰 힘"

1992년 4월29일 오전. LA다운타운에서 의류공장 '액티브USA'를 운영하던 이 돈(58.영어명 단 리) 회장은 한인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심상찮은 뉴스 속보에 귀를 기울였다.

"'로드니 킹 사건 재판이 있는 날이고 분위기가 심상찮으니 오전에 일찍 업소를 비우고 귀가하는 게 좋겠다'는 멘트가 수시로 반복되고 있었어요. '뭐 큰 일이야 있겠어'라는 생각이었지만 혹시나 싶어 오후 2시께 공장 문을 닫고 퇴근했지요."

하지만 그것이 미국 이민 후 5년 만에 힘겹게 장만한 의류공장과의 마지막이었다. 당시 공장은 메인과 31가에 위치해 있었다. 폭동이 시작된 곳과 불과 수 마일 거리였다.

"집으로 간 지 2시간도 안돼 경비업체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폭도들이 침입했나 본데 불을 지르고 아주 난장판이다. 아무래도 공장엔 안 가는 게 좋겠다'는 말이었어요. 그리고 나서 오후 5시쯤 지나 TV를 보니까 우리 공장이 화염에 휩싸인 게 나왔어요. 공장이랄 것도 없는 비좁은 곳에서 열심히 돈을 모아 100만 달러짜리 건물을 마련한 지 6개월도 채 안됐었는데…."



'4.29 LA 폭동' 당시를 설명하던 이 회장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20년이 지난 일이지만 당시의 고통스런 기억들은 지우기 힘든 모양이었다.

"왜 안 그렇겠어요. 그게 어떻게 마련한 공장인데 아내와 가족처럼 지낸 직원들과 함께 새벽 별을 보고 나와 퇴근시간도 따로 없이 몇 년을 고생하며 장만했는데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미국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폭동으로 기록된 'LA 폭동'은 6일간 무려 54명이 사망하고 10억 달러의 재산 피해를 냈다. 흑인 로드니 킹과 백인 경관의 문제가 한-흑 갈등으로 비화되면서 한인 사업자들이 입은 피해는 엄청났다.

폭동이 시작되면서 곧바로 화염에 휩싸였던 이 회장의 의류공장은 한인의류업체가 입은 첫 번째이자 가장 큰 규모의 피해 사례였다.

◆술로 지낸 일주일

"당시 심정이요? 그걸 어떻게 한마디로 할 수 있겠어요. 너무 억울해 말도 안 나오고 가슴만 놀란 듯 뛰는데…."

불에 타버린 이 회장의 1만5000스퀘어피트 공장 안에는 수십 대의 재봉틀과 원단 완성된 옷들이 있었지만 한순간에 사라졌다. 피해액만도 250만 달러는 넘었을 것이라는 게 이 회장의 설명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외상거래는 거의 안했어요. 원단 값도 물건을 받으면 즉시 치르는 식이었죠. 결국 불에 타 버린 그 많은 원단과 옷들이 모두 내 피해로 돌아왔던 거죠."

불의의 사고에 망연자실한 이 회장은 이후 일주일 동안 술에 취해 살았다. 아무 곳에도 하소연할 수 없는 억울함을 술로 밖에는 풀 수 없었다고 했다. 폭동이 진정된 후에도 이 회장은 한동안 공장에 가지 않았다. "검게 변한 현장을 볼 용기가 안 났어요. 아내는 '술 그만 먹고 다시 하자. 다시 하면 된다'며 용기를 줬지만 도저히 폐허가 된 공장을 내 눈으로 볼 수는 없었어요."

◆세금보고와 보험의 위력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라는 말이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입니다."

술에 쩔어 지내면서 회생방법을 찾던 이 회장은 마침 폭동이 발생하기 한 달여 전 사업확장을 위해 인근에 리스계약을 해 둔 매장을 떠올렸다. "쇼룸으로 운영할 생각으로 2000스퀘어피트짜리 가게를 월과 11가 사이에 얻어 둔 게 있었어요. 공장에 있던 물건들은 다 탔지만 봉제공장에 하청을 준 옷들이 있으니 이를 모으면 작게라도 다시 한 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마침 정부에서도 재난을 당한 사업주들을 위해 장기 저리 융자 제도를 시행한다는 발표가 있어 이 회장에겐 큰 힘이 됐다.

"아버지 부시(조지 H.W. 부시)가 정말 고마웠죠. 4% 이자로 30년간 최대 50만 달러를 FEMA(연방재난관리청)를 통해 빌려 준다니 큰 희망이 생긴 거였죠. 당시 은행 이자가 7~8%대 였어요."

FEMA의 도움을 아무나 받을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큰 피해를 입어도 세금보고 기록이 없는 사람들은 FEMA 혜택을 볼 수 없었다. 당시 피해를 본 한인의류업자들의 경우 대부분 영세 사업자라 세금보고를 제대로 하는 경우가 드물었기에 FEMA의 혜택을 본 경우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회장은 당시 세금보고 기록이 있었고 피해 규모도 컸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 회장은 또 대형 보험사에 가입해 있어 이 역시 재기에 큰 힘이 됐다고 한다. 폭동으로 영세 보험사들이 파산을 해 보험금을 받지 못한 한인 업주들도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지금 생각해도 그 폐허 더미에서 어떻게 다시 일어섰나 싶어요. 불 탄 공장 앞에서 눈물 흘리며 진심으로 안타까워 하던 직원들 격려를 아끼지 않던 친척들과 주변의 지인들…."

그 중에서도 이 회장은 포에버 21의 미세스 장(장도원 회장 부인 장진숙씨)과 원단회사 CKM의 마이클 김 사장 윌셔은행 다운타운 김학진 전 지점장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 회장은 "미세스 장은 포에버 21이 더 큰 건물로 옮기면서 먼저 있던 사무실을 쓰도록 배려했고 CKM 김 사장은 외상으로 원단을 대주고 윌셔은행 김 지점장도 당장 급한 소액 대출의 편의를 봐주기도 해 사업을 금방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 회장은 "FEMA의 지원이나 보험사의 보험금은 신청 후 6~12개월 후에나 나오니까 당장 도움이 안됐어요. 그런데 평소 신용있게 사업을 한 탓인지 외상매출(AR)을 준 업체들로부터 '외상값이라도 먼저 주겠다'고 해 가슴이 뭉클했었다"고 말했다.

◆아픔 딛고 새로운 꿈을 향해

"폭동은 여전히 아픈 기억이지만 내겐 큰 전환점이 됐습니다."

이 회장은 폭동을 계기로 봉제공장을 접고 의류 매뉴팩처에만 전념하게 됐다. 화재로 재봉틀이 다 망가지기도 했고 임시로 마련한 매장도 규모가 작아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지만 이 회장에겐 사업을 슬림화 집중화함으로써 빨리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이 회장은 폭동이 일어난 후 3년 만에 한인의류업자들이 공동 설립한 샌피드로 홀세일마트에 여러 개 매장을 매입할 만큼 사업체를 정상화시켰다.

타고 난 근면과 탁월한 사업감각으로 사업도 예전보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켰다. 2000년대 초반부터 중국이 의류 및 제조업의 생산기지로 부각하자 이 회장은 로컬 생산을 접고 수입상으로 변신했다.

"다른 업체들보다 의류사업의 흐름에 한 발짝 앞선 선택을 했던 게 지금의 '액티브USA'를 있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회장은 1998년 새한은행 이사로 참여 이사장까지 오르는 등 왕성한 사업활동을 펼쳐왔다.

5년 전엔 지금의 알라메다와 48가에 7만5000스퀘어피트짜리 건물로 이사했고 내년엔 추가로 공장건물을 지어 회사 규모를 더욱 확장할 계획이다.

이 회장이 바라보는 4·29
"우리도 한번쯤 반성…배려가 적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4.29 폭동과 관련해 많은 이야기들이 오간다. 그 중엔 ‘우리가 잘못한 게 뭔가. 정말 죽도록 열심히 일했고, 그렇게 돈을 번 게 나쁜가. 그런데 왜 하필 한인들에게 이렇게 큰 시련이 생겼는가’ 하는 말들이다.

그러나 우리도 한 번쯤 반성할 일도 있지 않은가 싶다. 당시 폭동의 진원지는 흑인들이 많이 사는 사우스 센트럴 지역이었다. 한인들은 그 곳에서 대부분 리커스토어를 운영하며 억척스럽게 일했다. 휴가도 반납하고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지만 반대급부로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근면과 성실, 지혜로움은 한인들이 가진 최고의 무기였다. 그러나 우리는 배려가 적었다. 내가 번 돈이라고 가난한 동네에서 벤츠, BMW를 타고 일부 거들먹 거리는 부류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1992년 당시 사우스 센트럴 지역의 흑인들은 경기 불황 탓에 실업자들도 많았다. 그들에겐 분출구가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로드니 킹 사건은 분명 흑인과 백인의 대결이었지만 정치력이 부족했던 한인은 억울하게 흑인들의 타깃이 됐다. 우리 스스로 자초한 부분이 있었다는 점과 정치력 신장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미주 이민 100년을 훨씬 넘기면서 이제 한인들도 2세들의 성장과 함께 주류사회 진출이 크게 늘었다. 연방하원부터 주, 시의원 진출도 눈에 띄게 늘어, 예전처럼 무기력하게 당하지만은 않게 됐다. 하지만 좀 더 많은 한인들이 한국 정치에만 관심을 갖기보다, 내가 살고 있는 미국 정치와 투표에 적극 참여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타 커뮤니티도 배려하고 우리 나름대로는 힘을 키울 수 있을 때 제2의 LA폭동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김문호 기자 moonkim@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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