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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20/20] 탄생 100년 맞은 천재 시인 백석

김완신/논설실장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불운했던 한 시인이 출생한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는 시인 백석이다.

백석은 월북작가라는 이유만으로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철저히 잊혀진 작가였다. 서정적인 시어로 한국적 모더니즘을 개척한 그는 이름 앞에 '천재 시인'이라는 수사가 붙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런 그의 작품도 지난 1988년 7월 19일 월북작가 120명에 대한 해금조치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남한에서는 읽을 수도 연구할 수도 없는 '불온'의 글이었다.

백석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한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이제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과 번역문 등을 모아 '백석 문학전집 시ㆍ산문'이 최근에 출간됐다.

1930년 조선일보를 통해 등단한 백석은 향토적 서정성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지만 월북한 이후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그는 사상을 강조하는 북한문단에서 예술을 고집했다. 1957년 아동문학 논쟁에서 계급성을 거부하고 창작성을 강조한 것이 화근이 됐다. 결국 북한당국에 의해 50년대 후반 양강도 삼수 관평리 벽촌으로 쫓겨났고 그곳에서 양치며 농사짓고 살다 1995년(또는 19996년) 일생을 마감했다. 체제와 이념에 붓을 뺏긴 채 문학의 변방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것이다. 문학평론가 최동호 교수는 백석의 북한체제에 대한 충성심 부족과 부르주아적 성향이 창작을 금지당한 원인이 됐다고 설명한다.



남북분단 이후 이념적 대립은 한국문학사에 잊혀진 작가들을 양산했다. 월북시인 정지용도 해금 이전에는 한국문학사에서 거론조차 할 수 없는 작가였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로 시작되는 그의 시 '향수'를 읽는 것만으로 국가보안법의 처벌 대상이 됐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정지용이 남한에 남았다면 '민족시인'의 칭호가 김소월 대신 그에게 주어졌을지도 모른다.

근대문학사에서 대하역사소설의 지평을 열었던 벽초 홍명희 작품 '임꺽정'도 80년대 후반까지는 금서품목이었다. 조선 민중의 삶을 큰 획으로 그린 당대의 풍속과 언어묘사가 뛰어난 작품이었지만 출판자체가 불허됐다. 특히 홍명희는 월북해 부수상에 해당하는 고위직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지금은 책으로 출간됐지만 80년대 해금 이전에 신문연재 작품을 복사해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시위대를 진압하는 전투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렸던 기억이 있다. 다행히 가방을 수색했던 경찰이 임꺽정을 무협지 정도로 생각해 넘어갈 수 있었다.

월북작가들 중에는 한국문학에 현대성을 부여한 뛰어난 작가와 평론가들이 많다. 30년대 모더니즘 대표작가 박태원 서구 시이론을 정착시킨 김기림 문화이론과 평론을 소개한 임화 등이 대표적이지만 문학사적 가치나 작품성에 상관없이 이념의 잣대로 분단 한국의 문학사에서 배제됐었다. 체제 이데올로기에 희생됐던 그들의 작품들이 한국문학사에 뒤늦게라도 자리매김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1920년대 사회주의 이론에 탐닉했던 작가들이 결성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참여했던 박영희는 이념에 편중된 문학에 반기를 들고 탈퇴하면서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이며 잃은 것은 예술'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념에 가려진 문학의 예술성 회복을 강조한 것이다.

한 시절을 휩쓸던 이데올로기는 사라져도 문학의 순수성은 영원하다. 이념의 격랑을 헤치고 오롯이 남은 백석의 시어(詩語)들은 시대를 초월해 지금도 맑고 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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