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김복동 할머니의 이야기' 들어보실래요?

"아직도 꿈꾸는 아픈기억…하지만 내가 나서야지"
LA방문 김복동 할머니와 동행한 6일

한쪽 시력 잃어 얼굴 보이지도 않지만
증언 위해 대학강의 등 긴 여정 동참
글렌데일 '한국 위안부의 날' 이끌어 내


김복동 할머니는 86세의 위안부 피해자다.

군복 공장으로 딸을 보내지 않으면 재산을 뺏어 동네에서 쫓아내겠다는 구장과 반장의 협박으로 14세의 나이에 끌려갔다. 공장이 아닌 위안소에 배치된 김할머니는 대만 싱가폴 수마트라 등으로 끌려 다니며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두려움의 세월을 견디어냈다.

극적인 귀국 후 1992년 피해신고를 했다. 위안부 결의안 HR121 통과 5주년을 맞아 지난 달 25일부터 6일간 LA에 머물며 가주한미포럼이 개최한 일본 총영사관 앞에서의 수요시위 대학 강연 등에 참석 글렌데일 시의 한국 위안부의 날 선포를 이끌어냈다. 그 여정에 기자가 함께 했다.



"어떡하죠? 할머니가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다보니 힘드시다고. 편하게 혼자 식사하고 싶으시대요."

위안부 결의안 통과 5주년 행사를 앞둔 점심 시간 할머니와 점심식사를 하고 싶어 건 전화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안선미 팀장이 미안하다며 대답했다. 실제로 빡빡한 행사 스케줄에 할머니 모시고 식사 대접하고 싶다는 사람이 줄을 섰었다.

지난 25일 수요일 워싱턴 DC에서 결의안 5주년 행사에 참석하고 LA에 도착한 김할머니는 여느 때보다 바쁜 일주일을 보냈다. 수요시위에 CSULA 강연 기자회견 라디오 방송 출연 결의안 통과 5주년 행사에 글렌데일 시의회 참석.

스케줄이 비면 사람들이 앞다투어 할머니를 만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식구'라고 부르시는 윤미향 정대협 대표 안팀장과 하는 편안한 식사 한끼가 그리웠던 모양이다.

씩씩하고 강단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김 할머니는 아주 여리고 조용했다. CSULA 강단에서나 라디오 출연 중에 하시는 말은 아주 정확하고 잘 정리되어있고 힘이 있다. 하지만 평소에는 조금만 말을 길게 시켜도 입이 마르니 말을 시키지 말라고 하신다.

백내장 수술의 후유증으로 할머니는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고 오른쪽도 희미하게 형체만 알아볼 정도다. 한 손에는 윤대표 한 손에는 안팀장의 손을 꼭 잡고 다닌다. 낯선 곳에서는 식구들에게 "이제 가고싶다"라고 불편한 기색을 비친다.

그래도 이 먼 곳까지 와서 앞도 안보이고 긴 말 하기도 힘들면서 똑같은 증언과 인터뷰를 거듭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애처롭기까지 하다.

대학에서의 강연과 학과장들과의 점심식사 후 돌아가는 길에 윤대표가 물었다. "할머니 그래도 요새는 이렇게 [증언]하고 나면 꿈은 안꾸지? 이제 할머니가 많이 [아픈 기억을] 놓고 자유로워 지는거야."

매 증언 마다 옛 기억을 더듬어야 했던 김할머니. 위안부 피해 신고 후 20여 년 동안 증언 후 꿈을 꾸었다고 한다. 증언할 때면 늘 위안소에서의 자세한 생활은 건너뛰어 버리는데도 그 기억이 살아나 늘 꿈에서 다시 마주해 온 모양이다.

심지어 회를 좋아하지만 일본 것이라 와사비 대신 고추장에 찍어 먹는단다.

라디오 방송출연 중 할머니는"이렇게 오래 걸릴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나오지 않았지요"라며 지난한 세월에 대한 속내를 내비친다. 폭스 뉴스와 40분 가량 가진 인터뷰에서는 매번 하는 이야기를 반복하면서도 끝내 눈물을 보였고 전화로 인터뷰하던 외국인 여기자도 울었다. 피곤하실 테지만 행사 중에는 지친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시력을 잃어 얼굴도 보이지 않는 외국인 손을 잡고 "땡큐 땡큐"를 외치니 방금 까지도 힘들다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위안부 생활 후 부산에서 횟집을 크게 해서 돈을 꽤나 벌었다는 할머니는 "이래 퍼주고 저래 퍼주고 없는 사람 다 나눠주고" 남은 것도 없단다. 그러면서도 "부산에 내 아파트도 있어. 한국에 다이아도 있는걸 뭐. 죽기 전에 아끼면 뭐하노 다 누릴거 누려야지."라며 웃는다. 아마도 시위 때 밍크코트 갖춰 입고 나오는 할머니들의 속마음이 아닐까.

배상금에 대한 욕심은 없단다.

올해 초 길원옥 할머니와 설립한 나비기금을 통해서는 일본 정부에게 배상금을 받으면 콩고의 전시 강간 피해 여성에게 전액 전달한다고 했다. 이미 나비기금 1호 기부자 이효리씨부터 시작해서 모인 기금으로 콩고 내전에서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위한 학교 부지도 기부했다.

LA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내가 LA 기림비 세우는데에 1000불을 기부해야겠다. 내가 하면 남들도 더 하지 않겠나"라는 제안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LA에 기림비가 세워질 때 미국에 다시 오시겠다며 그동안 몸관리 잘 하겠다는 다짐도 들었다.

사진 전시회에 사진을 보냈던 김영희 사진기자가 워싱턴에서 열린 결의안 5주년 행사 후 보낸 이메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할머니 손등에 키스해드려봐요. 그러면 할머니가 손등에 키스로 화답해주시는데 그게 'eternal good luck'(영원한 행운)을 가져다준대." 지난 목요일 할머니 손에 키스해드리자 활짝 웃으며 기자의 손등에 키스를 해주었다. 위안부 생활 후 천하에 엄마라고 불러줄 자식이 없는 것이 가장 서럽다는 김복동 할머니. 친 자식은 될 수 없더라도 대한의 자식된 도리로 그분의 걸음에 동참하는 것이 손등의 키스보다도 더 힘이 되지 않을까 싶다.

글·사진=최원 인턴기자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