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오픈 업] 인종차별의 배타적 심리

수잔 정/소아정신과 전문의

1871년 10월 24일 다운타운 유니온 정거장 올베라 거리 시빅 센터 인근을 피로 물들인 잔혹한 사건이 있었다. 캘리포니아가 정식 주로 승격됐던 1850년대에는 히스패닉계가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이후 30년이 안돼 유럽계 백인 이민자들이 주민의 80%를 차지했다. 1870년대 금을 찾아 가주로 몰려온 사람들 중에는 문제 투성이의 광부 소를 치던 목동 싸움을 일삼던 부랑자들이 많았다. 그 때는 법보다는 폭력이 먼저였다.

샌프란시스코는 당시 가주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다. 인구가 15만 명이나 되는 미국에서 10번째로 큰 도시였다. 이에 반해 LA 인구는 5700명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유럽에서 이민 오는 백인들이 이윤이 높은 과일 나무 경작과 가축 목장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큰 도시로 발전해 나갔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인 이민도 늘어났다. 1861년 30명이던 중국인은 9년 뒤인 1870년에 179명이 됐다. 이는 주민의 3%에 해당되는 숫자다. 중국인이 늘어나자 반중국인 정서도 점점 커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1871년 10월 24일 끔찍한 사건이 터졌다.

그날 중국인 두 패가 서로 총질을 하며 싸우고 있었다. 경찰관 두 명과 용감한 시민 한 명이 싸움을 말리려다가 그 중 경찰관 한 명과 시민이 사망했다. 이름이 톰슨이었던 시민의 사망 소식은 '중국인이 백인을 총쏘아 죽였다'라는 소문과 함께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중국인에 대한 반감은 커졌고 그날 밤 총에 맞거나 고문을 당해 18명이 죽었는데 모두 중국인이었다.



앞의 내용은 얼마 전 캘폴리 포모나의 마이크 우 교수가 LA타임스에 기고한 내용이다. 마이크 우 교수는 LA시의원으로 재직했던 유일한 동양인으로 100여년 전 이런 끔찍한 인종차별을 당했던 중국 이민자의 후예다.

나와 다른 것 또는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은 처음엔 덮어 놓고 싫어하는 것이 모든 어린이들의 특징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늘 먹던 음식이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에게도 편하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들도 접해보려는 자세를 갖는다.

교육 정도가 높고 생활이 안정된 백인 중에는 낯선 사람에게도 친철과 배려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을 자신과 다르다며 배타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교육 수준이 낮고 별로 자랑거리가 많지 않은 일부 백인들은 몹시 배타적이고 자신들만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과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기에는 자신들의 삶이 너무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곧잘 심술 난 어린 아이처럼 자신과 다른 것은 덮어 놓고 도리질을 하기도 한다.

100여 년전 중국계가 당했던 차별을 우리는 불과 20년전 LA폭동을 통해 겪었다. 수많은 한인 업소가 강탈당하고 불에 타고 있는데도 백인 경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인들은 그후 꾸준히 정치력을 신장시켜 왔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미국은 다민족 사회다.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은 계속해서 소수계로 살아갈 것이다. 그런 만큼 우리 후손들이 힘이 없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정치력을 길러야 한다. 다시 우리의 자녀들을 억울한 희생양으로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