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s Angeles

59.0°

2020.04.04(Sat)

[이아침에]땅 끝에서

[LA중앙일보] 기사입력 2001/10/16 10:22

테러 사건 이후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습니다. 공항에서의 검색이 삼엄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비행기 수속은 예전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습니다. 엑스레이 검사대를 지나면서는 조금 긴장했습니다. 손가방 속에 들어있는 노트북 컴퓨터를 분명히 작동시켜보라고 할테니 귀찮겠다 싶어서였지요. 그런데 그 컴퓨터 마저 무사 통과를 했습니다. 오히려 전에는 가끔 문제가 되기도 했던 노트북 컴퓨터가 또 다른 비행기 테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 상황에서 무사히 검색대를지날 수 있다는 게 좀 의아했습니다. 열 사람이 한 사람의 도둑을 막지 못한다는 옛말도 있듯 이 많은 승객들의 짐을 철저하게 조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저는 지금 캐나다의 동쪽 끝에 와 있습니다. 캐나다 사람들이 땅 끝이라고 부르는 이곳에도 테러의 소식은 깊숙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TV를 켜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언제나 테러에 관한 뉴스가 흘러나왔습니다. 인가라고는 없는 깊은 산 속에 외따로 서있는 작은 집들에도 캐나다 국기가 반기로 게양되어 있었습니다. 번잡한 도시를 떠나 자연 속에 묻혀 살고있는 그들 마저도 이번 사건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세계 어디를 가나 캐나다 인들은 자신들이 캐나다 사람인 것을 표시하고 다닙니다. 옷이나 모자 혹은 배낭 등에 캐나다의 상징인 빨간 단풍잎이 그려진 작은 핀을 꽂고 다닙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미국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고있기 때문에 오히려 미국인이 아님을 굳이 밝히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번 여행길에 성조기 핀을 꽂고 다니는 미국인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어디에서나 미국인임을 자랑스러워했던 그들이 옷깃에 성조기 핀을 꽂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미국은 하나다. 미국이여, 힘을 모으자" 뭐 그런 비장한 느낌이 아니었을까요.

여기는 작은 어촌들이 해안선을 따라 점점이 흩어져 있는 곳입니다. 어느 마을은 인구가 겨우 200여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웬만한 규모의 마을에 가면 중심부에는 의레 전쟁에서 숨진 장병들의 추모비가 서 있습니다. 일차 대전과 이차 대전 그리고 한국 전쟁에서 전사한 그 마을 출신들을 위한 기념탑입니다. 어쩌면 그 기록들 아래 2001년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전쟁의 역사가 한 줄 덧붙여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을 했습니다. 마을에서 제일 큰 상점 입구에는 뉴욕 테러 희생자 가족들을 돕기 위한 모금함이 놓여있었습니다. 모금함 속에는 동전들이 소복이 들어있더군요. 캐나다 변두리 작은 어촌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부자 나라 미국인들을 돕겠다고 돈을 모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미국은 이제 "우리가 제일이다"라는 자만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지만 미국은 오히려 더 강경하게 "우리편이 아니면 적이다"라는 흑백논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고장은 18세기 말, 식민지를 넓히려는 영국과 프랑스간의 영토 다툼이 치열했던 곳입니다. 특히 영국계가 세력을 잡으면서 많은 프랑스계 주민들을 강제로 추방했고 그들은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고 가족들과도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그 사연을 그린 것이 롱펠로우의 유명한 서사시 '에반제린'입니다. 주인공 에반제린이 추방되어 행방을 알 수 없게된 연인을 평생토록 찾아다니다가 결국은 그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서야 만나게 된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 무심코 읽었던 '에반제린'을 이곳에 와서 다시 읽으면서 테러 희생자들의 가족을 떠올렸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 하나로 에반제린은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희생자들은 그런 기대마저 가질 수가 없습니다. 배경과 방법만 달라졌을 뿐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들의 욕심으로 인한 분쟁과 슬픈 사연들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인이건 아랍인이건 또 유대인이건 간에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찾아올까요? 풀어지지 않는 응어리가 하나 얹힌 듯, 자꾸 가슴이 답답해 옵니다.

오늘의 핫이슈

PlusNews

포토 뉴스

전문가 칼럼전문가 전체보기

HelloKT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