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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절 그사람] 테너 이우근씨: 노래로 한국알리기 혼을 태운 불꽃인생

로스앤젤레스 지역 한인 수가 2천명에서 3천명 사이를 헤아리던 시절에 오페라 ‘춘향전’이 공연됐다. 케네디 이민법이 적용되기 전이라 이곳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하와이에서 건너온 이민 후손과 유학생, 영사관 직원들, 한국전쟁후 미국인들과 결혼해 온 애국부인회 소속 한인들이 거의 다였다.

1965년 9월 11일, 버논에 있던 코리아센터 무대 위의 춘향전은 그 어느 춘향전보다 감동적이었다.

한국에서 음악사상 처음으로 한국인의 손으로 서양 오페라가 만들어져 공연된 것은 1948년 ‘라트라비아타’였다.

1년 후인 1949년에 다시 ‘칼멘’이 공연되었고 한국 오페라가 무대에 올려진 것은 1953년 ‘춘향전’이었다.



현제명 작곡으로 시공관에서 초연됐는데 몽룡역은 이우근씨와 홍진표씨가, 춘향역은 이경숙씨와 장혜경씨가 맡았었다.

그리고 꼭 12년 만에 오페라 `춘향전‘이 로스앤젤레스의 무대에 올려져 이민 음악사에 귀중한 한장을 차지했다.

오페라 춘향전의 LA 공연에는 8백여명의 관객이 몰려들었다. 특히 1.5세와 2세 젊은이들이 몰려와 한국적인 이야기, 한국의 음악, 한국의 의상 등 한국문화에 대한 새로운 경험에 흥분했다.

예상을 훨씬 넘어선 반응에 어렵사리 무대를 마련한 테너 이우근(71)씨와 주최측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곳에 한국문화를 소개하고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한국문화를 접하게 하기 위해 오페라 춘향전을 공연하기로 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오페라 춘향전에서 이도령역을 하면서 연출이나 무대장치, 의상 등 작품 전체를 알고 있어 자신이 있었지요. 그런데다가 춘향전이 갖고 있는 정서야말로 거의 모든 한국인들이 이해하고 있는게 아닙니까.”

이우근씨는 연출과 이도령역, 무대의상에서부터 총감독까지를 맡았고 춘향역은 다이앤 장씨가 맡았다. 다이앤 장씨는 서울 음대를 졸업한 후 USC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있었다. 후에 산타모니카 오페라에 소속되어 마리오 란자 밑에서 오페라 공부를 하기도 한 재원이었다. 이우근씨는 다이앤 장씨의 근황을 몰라 몹시 아쉬워하고있다.

오페라 ‘춘향전’의 입장은 무료였지만 그해 한국에 홍수 피해가 컸기 때문에 조국 이재민을 돕기 위한 도네이션을 받았는데 모두 1천9백80달러가 모여 한국 경향신문사를 통해 전달하기도 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한국에서 살았던 사람은 당시 성악계의 정상에 있던 테너 이우근씨를 기억한다. 당시 한국의 오페라는 ‘테너 이우근이 없으면 일이 안된다’고 할만큼 그의 위치는 중요했다. 한국에서 오페라가 소개되기 시작하던 시기에 ‘라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역에서 부터 춘향전, 오셀로, 왕자호동, 피델리오, 돈조바니, 루치아 등에서 주역을 하면서 그는 눈부신 성악가의 길을 걸었다.

테너 이우근씨의 특징은 고음을 하이 C까지 낸다는 것과, 고음에서 피로를 느끼지 않아 언제라도 고음을 낼 수 있다는 것, 호흡이 매우 길다는 것, 그리고 섬세한 해석과 이해 등이다. 한국에서 그의 공연을 본 사람들은 자유롭게, 아름답게 터져나오는 젊은 날의 그의 노래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오페라 ‘춘향전’에 나오는 ‘이리봐도 내사랑, 저리봐도 내사랑’은 지금까지도 폭넓게 애창되는 인기 명곡으로 자리잡았다.

이우근씨는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내과의사였던 부친이 철원도립병원에 근무하면서 그도 철원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그가 중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소프라노 김천애씨가 독창회를 하러 철원에 왔다가 이우근씨의 노래를 듣고 성악을 공부하도록 권고했지만 본인은 부친을 이어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해방 후 이우근씨는 리어카에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누나 동생을 싣고 피난길에 나서 구사일생으로 3.8선을 넘었다. 3.8선을 넘자마자 따발총이 발사되는 통에 리어커와 함께 개골창 속으로 빠져 그야말로 1,2초 사이에 목숨을 건진 극적인 체험을 하기도 했었다.

서울로 와서는 장학금을 받으며 경동중학교에 다녔다. 4학년 재학중에 국내 최초로 서울 음대 주최 중학생(고등학교가 따로 없던 때) 음악 콩쿨대회에 출전해 성악부 1등을 하면서 그의 삶은 바뀌기 시작했다. 각 학교의 음악회에는 게스트 솔로 싱어로 초대되어 갔고 경동학교 음악회가 있는 날에는 남녀학생들이 몰려들어 학교가 난리를 치러야 했다.

“성악가 현제명박사가 부친을 찾아와 제가 성악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간곡하게 설득을 하셨지만 부친은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셨어요. 사내가 풍각쟁이가 되어 무얼 하겠느냐, 어림도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현제명박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부친을 찾아오셨어요. 서울 음대에서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며 설득을 해서 아버지도 손을 들고 말았어요.”

1950년 5월에 서울 음대를 졸업하고 한달 있다가 한국전이 터졌다. 전쟁통에 도망을 다니다가 수복후 미 5공군 정훈목사실에 근무하며 미군 교회에서 합창을 했다.

“환도 후에 처음으로 취직한 곳이 선린상고 음악선생 자리였어요. 2년여 가르치다가 이화여고로 옮겨 이화여고와 예고에서 가르쳤지요. 당시 예고에는 임원식, 오현명씨 등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후에 한양대학에서도 강의를 했고요.”

그는 서울 오페라단과 국립오페라단에 들어가 오페라 가수로 활약하면서 교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1964년, 이우근씨는 미국에 올 기회가 있었다. 콜로라도 덴버에서 국제 와이즈멘 컨퍼런스가 열리는데 와이즈멘 회원이었던 이우근씨가 오게 된 것이다. 비자 받기가 정말 힘들던 때였지만 비자를 발급해주는 부영사가 이우근씨의 목소리에 반해 있던 사람이라 수속을 시작한 당일로 비자를 받아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당일에 떠나느라 주위 친지들에게 미국에 간다는 인사도 못하고 떠났다고 한다.

와이즈멘 국제 회의를 마친후 세계 각국으로부터 온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을 축하하기 위해 마리오 오페라 컴패니의 공연이 있었다. 이들의 공연이 끝나자 한국인 회원들은 이우근씨를 무등 태우다시피해 무대에 오르게 했다. 독창을 해서 한국인의 노래실력을 보여주라는 것이었다. 그는 ‘라보엠’의 ‘그대의 찬손’ 등 유명한 아리아를 불렀는데 관중들은 박수를 그치지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시카고 오페라의 지휘자면서 로스앤젤레스 콘서버토리 오페라 주임교수인 밴 그로번박사는 이우근씨에게 함께 LA로 가자고 요청했다.

“친구들에게 떠난다는 말도 못하고 조국을 떠났는데 돌아가는 대신 로스앤젤레스로 오게된 거에요. 그리고는 40년 가까이 이곳 사람이 되어 살아왔습니다. 제가 와보니까 권길상선생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시더군요. 권선생의 형님 권희상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제일 연합 장로 교회에서 권선생이 반주를 하고 저는 지휘를 하며 10년동안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태어나서 35년을 산 조국인데 참으로 어이없게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와서는 이렇게 오래 외국생활을 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로 온 후 그는 잔 포파박사와 함께 UCLA에서 오페라 워크샵을 주관했고 캘스테이트 LA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제까지 어디서든지 저를 부르기만 하면 한복을 싸들고 달려갔습니다. 동부 7개도시 순회공연등 미국 전국을 돌며 한국의 문화를 알릴 수 있다면 전심을 다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미 전국에서 독창회나 초청 음악회, 한국가곡의 밤, 각종 기념음악회, 기금모금 음악회 등 음악회 무대에만 50회 이상 서왔습니다. 모두가 제게는 뜻깊고 귀중한 무대였지요. 1975년 LA 뮤직센터에서 라저 와그너 합창단과 베토벤 제9교향곡 연주에서 독창을 한것, 1981년에 오현명, 이영애, 이귀임씨 등과 윌셔 이벨극장에서 가졌던 4인음악회, 1990년 북한에서 있었던 남북가곡의 밤, 지난해에 가진 고희음악회 등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는 부인 이용애(71)씨와 패사디나에 살고 있다. 3남1녀에 손주가 다섯이다. 한국에서 살았더라면 더 많은 후배를 양성했을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긴 하지만 해외에서 우리 문화를 소개하며 살아온 것도 보람이 있었다고 믿고 있다.

그는 1980년대 초에 시작한 벨칸토 음악 연구소를 운영하며 성악을 전공하는 후배들을 개인지도 하고 있다. 또 미주 총신대학교 기독 예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러나 가르치는게 전부가 아니다. 전문가들과 많은 음악 애호가들은 이교수를 연전히 현역 성악가로 숭상하고 있다.

만난사람=고영아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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