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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빛나는 첫 문장'의 어려움

이종호/편집팀장

영어만 울렁증이 있는 것이 아니다. 평생 써 온 한국말도 대중 앞에 서면 울렁증이 생기고 글을 한 편 쓸 때도 매번 울렁증이 도진다. 처음 시작을 뭐라고 해야 하나.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끝은 어떻게 맺어야 하나.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얘기일 것이다.

처음이 버겁기는 작가라고 해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김훈의 장편소설 '칼의 노래'의 유명한 첫 문장이다. 하지만 처음엔 '꽃이 피었다'가 아니라 '꽃은 피었다'였다. 별 차이 없어 보이는 한 줄이지만 김훈은 담배 한 갑을 다 태울 정도로 고민한 끝에 결국 '꽃이 피었다'로 정했다고 한다. 첫 문장을 놓고 작가가 얼마나 고민하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예화다.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신경숙도 비슷한 말을 했다. "300매 가량 썼는데도 글이 자연스럽지 않았어요. 잘 열리지 않는 문을 억지로 열려 한다는 느낌이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엄마를 잃어버린 지 1주일째다'라는 첫 문장이 찾아왔어요. 그동안 쓴 것을 모두 버려야 했지만 그 첫 문장을 선택했을 때 바닷물이 저 문으로 밀고 오듯 글이 덮쳐왔어요."

이렇듯 작가들은 첫 문장이 작품의 수준을 가늠한다고 생각한다. 소설만이 아니다. 수필도 칼럼도 심지어 연애편지 하나도 첫 문장이 전체 글의 성패를 결정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현실을 들여다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명문은 고사하고 글쓰기 자체가 두려움인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일상의 삶도 다르지 않다. 사업도 취업도 남녀 간 만남 조차도 그날의 첫 한마디에 따라 결과가 좌우될 때가 많다. 모두가 첫인상에 안달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역시 현실로 돌아와보면 멋진 시작에 대한 부담감으로 정작 도전조차 엄두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시작 자체가 '사건'인 그런 그런 사람들에게 '빛나는 첫 문장' '눈부신 첫인상'은 그래서 너무 가혹한 주문이요 가당찮은 사치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대통령 자신도 첫 여성대통령으로서 무엇인가 다른 첫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조직법에 발목 잡혀 취임 3주가 되도록 내각 구성조차 끝내지 못한 것은 영 모양새가 아니었다. 소통 방식이나 인사 스타일을 두고도 말들이 많아 새 정부의 멋진 출발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렇다고 너무 조급해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늦게나마 여야 협상 타결로 이제부터라도 국정 운영을 위한 시동을 걸 수 있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사람은 겪어봐야 하고 평가는 끝나봐야 안다. 그러니 국민들도 조금 더 기다려주는 여유와 아량을 가졌으면 좋겠다.

호된 홍역 끝에 비로소 첫발을 내딛는 박근혜 대통령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또 다른 생각 하나.

세일즈에 탁월한 지인이 있었다. 그는 매달 자동차를 20여대씩 팔았다. 이는 일반 세일즈맨 평균 판매량의 두 배가 넘는 실적이다. 비결은 친절과 집요함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첫인상에 현혹되지 않는 것이었다. 문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차를 살 가능성이 똑같다고 생각하고 매순간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느 분야에서나 통용될 수 최고의 마케팅 노하우였던 것이다.

첫 문장은 밋밋하고 평범하지만 읽어갈수록 멋과 향이 피어나는 글은 많다. 시작은 보잘 것 없고 실수투성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멋과 품위가 더해지는 인생 또한 부지기수다.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는 것이 글이듯 우리의 삶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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