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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천당과 지옥 가르는 말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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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중앙일보] 발행 2013/04/19 미주판 22면 기사입력 2013/04/18 17:32

구혜영/사회팀 기자

'한글 자.모음 합쳐 24자 영어 알파벳 26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무엇일까 생각했을 때 문득 떠오른 답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글자다. 인간의 모든 감정과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도구. 한 자 한 자의 무게도 묵직하지만 소리로 바뀌면서 태어나는 '소통'은 놀랍기 그지없다. 같은 말 같은 글자를 써도 개개인의 받아들임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가 생겨날 수도 첫 의미가 흔적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천국과 지옥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유일한 통로다.

지난 17일자 1면에 게재된 '스타벅스를 이긴 한인 운영 동네카페'는 글자의 힘을 보여준 기적이었다. 스타벅스의 입점을 원하는 건물주에 의해 13년째 같은 자리를 지켜온 동네 카페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단골 손님들은 탄원서 628통을 썼다. 높게는 상원의원과 시장부터 낮게는 행인들에게까지 '우리들의 아지트'를 지켜달라 호소했다. "거대 체인점이 스몰 비즈니스를 위협한다" "카페가 없어지면 쇼핑몰 내 다른 가게들을 보이콧하겠다" 등의 똑 부러진 메시지는 건물주를 압박해 동네카페의 재오픈을 결정지었다.

5월 말 리모델링 공사를 앞둔 카페주인은 글자들 사이에서 '감사'라는 단어를 찾았다고 말했다. 카페를 위한 탄원서 한 줄에 우정을 느꼈다고 했다. 변호사에게조차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미셸 김(48)씨에겐 생각지도 못했을 기적이었을 것이다. 글자를 타고 흐른 이웃사랑은 퇴거 조치 당시 헤어졌던 옛 종업원들에게 '재채용' 의사를 밝히며 커가고 있다.

이와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가장 쉽게 접하는 예는 악성 댓글이다. 중앙일보 웹사이트를 찾아가면 눈 버리는 글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글자는 비판이 아닌 생뚱맞은 비난이다. 욕과 비속어는 기본. 몇몇 유명 악플러(?) 독자들을 분석해 본 결과 1) 한국을 깎아내리며 우월함을 나타내려는 과시형 2) 이유 없는 욕쟁이형 3) 모든 것을 종교와 연관지어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외골수형 등이 많았다.

그들의 글자는 자제력을 잃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힘든 증언을 한다는 기사엔 "현대판 한국계 매춘녀는 누구에게 하소연하나?" 북한 전쟁도발 기사엔 "이중국적자는 빨리 짐 꾸려 자진 귀국 입대하라" 하루하루 목마름으로 말라가는 차드 기사엔 "예수 믿으라며 물 준다. 성경 들고 학살하는 게 기독교의 근본"이라며 누군가의 귀한 아들 딸을 무자비하게 밟는다.

최근 말 실수로 마음고생을 톡톡히 했다. 말로 해결이 안 되자 글로 시도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한번 막혀버린 통로는 쉽게 열리지 않았고 섭섭함을 숨긴 가시 돋친 태도에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글자가 말로 변할 때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속담이 피부로 느껴졌다.

영어 알파벳 26자로 표현할 수 있는 소리는 300개 한글 24자로는 이론상 1만1000여 개다. 사람이 하루 평균 하는 말 2만5000마디 속에 담긴 수백만 개의 의미가 소리마다 녹아있는 감정의 폭이 너무도 넓어 무섭다. 격려와 막말 사이 소통의 캐치볼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서 더욱 기적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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