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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특파원의 방북 취재기 <4>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밴쿠버 중앙일보] 기사입력 2002/06/05 16:58

밴쿠버 한인들 방북기간 중 큰 인식변화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이제는 솔직해져야 한다”
지난달 25일부터 4박5일 평양 등 북한을 방문한 밴쿠버 지역 한인 16명은 이번 여행의 소감을 이처럼 간추렸다.
무엇보다 북한 체제에 대한 인정이 없이는 통일은 요원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됐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체험이다.

S씨(여.50대)는 “이 곳 사람들의 김일성. 김정일 숭배는 절대적으로 보인다.
오기 전까지는 체제에 강요된 점이 없지 않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만나본 사람들만 보면 진정으로 이들을 따르는 것 같다.
이들은 그것(김일성 숭배사상) 외에 다른 것을 따라 살 수 없을 것만 같다”고 말했다.

K씨(40대)는 “말로만 듣던 이들의 수령 숭배가 빈 말로만 들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방북 한인들이 만난 북한인들은 기관원이 대부분이다.
외부인을 상대하기 위해 특별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기자를 비롯한 한인들은 호텔 주변 야시장, 관광지에서 만난 주민들, 소년학생궁전에서 만난 어린이들 등 틈틈이 일반인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어디서 누굴 만나든 그들의 이야기는 신념에 차 있었다.
“김일성 수령님, 김정일 장군님”하면서 시작되는 그들의 말에서는 수령에 대한 경외심과 체제에 대한 믿음이 흠뻑 묻어났다.

기자는 이번 방북 동행취재 기간 중 밴쿠버 지역 한인들의 북을 보는 인식이 크게 달라지는 것을 지켜봤다.
50여년 전 반공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월남한 한 70대 남성의 입에서 “지금 와서 보니까 서로가 잘못이다”라는 고백의 소리를 들었고, 30대 남성에게서는 “한국에서 배우고 듣던 것과 너무나 달라 놀랍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핏줄을 나눈 사람들이다”며 민족의 동질성을 발견한 감탄의 말을 들었다.

평양이 고향인 월남자 H씨(70대)는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해외에서 받은 선물 수만점을 모아 놓은 묘향산 국제친선박람회를 돌아본 뒤 “외부인에게는 엄청난 낭비로 보여질 수 있겠지만 이들에게는 의미있는 곳”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외국인들이 자기 나라의 국보를 아끼듯 이들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체제와 가치에 대한 인정을 전제로 한 말이다.

또 이번 방북단 참가자들은 판문점에서 ‘남한의 침공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인민군 장교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민감한 반응을 자제했다.
신변의 위협 속에서 침묵을 지켰다기보다는 과거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는 미래지향적 사고가 이들을 지배했다.
다른 대목에서 한 교민이 “왜 한국군을 적군이라고 표현하는가”라고 장교에게 항의한 사실이 이를 대변한다.

한인들의 이 같은 인식변화는 북한 체재를 옹호하게 됐다기보다는 통일을 염두에 둔 전략적인 측면이 다분하다.

평양으로 들어가는 고려항공(국적기) 여객기의 누추함에서부터 어두컴컴한 밤거리, 행인들의 옷차림에 이르기까지 북한의 물질적 삶의 낮은 수준은 방북 한인들에게 자신들이 누리는 자본주의의 혜택을 새삼 느끼게 했다.
심지어 방북객 일부가 국영상점에서 나물을 사고도 싸가지고 갈 비닐종이나 포장한 박스, 테잎이 없었고 호텔과 공항에서마저 이런 물자를 쉽게 구할 수 없었던 일, 호텔 에스칼레이터가 사람이 올라서야 작동이 되도록 고안된 사실 등에서 북한의 어려운 물자사정을 감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아울러 북한의 체제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견고하며, 따라서 이들의 현재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평화롭게 통일된 조국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이해를 얻었다.

L씨(50대)는 “비록 북의 현실은 어렵다고 해도 개개인의 자질을 본다면 자긍심과 자존심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면서 “이들의 확고한 정신 자세에서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본다”고 소감을 밝혔다.
K씨(40대)는 “시장경제의 개방 속에서도 그 체제가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다"고 털어 놓았다.

기자 역시 북한의 주민들이 자신의 궁핍성을 부끄러워 한다기보다는 '미 제국주의에 맞서 조국 통일을 이뤄내기 위한 성전'을 수행하는데 따른 당연한 귀결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저녁 산책길에 만난 한 대학생은 "우리 공화국이 한 때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악으로 버텼다.
일단 악을 품고 나니 우리에게 두려운 게 없다"면서 "김일성 수령님이 항일투쟁 시기 고난의 행군을 하셨듯 우리도 현재를 이겨내고 있다"고 말했다.
지극히 평범한 시민으로 보이는 그의 말은 국가 지도부가 김일성 주석의 사망, 자연재해에 의한 극심한 기아사태 등을 겪으면서 국가 지도부가 위기를 관리하기 위해 내세웠던 통치 이데올로기('고난의 행군')가 확고히 자리잡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북한은 김일성 숭배사상과 '미 제국주의와의 투쟁' 의식 속에서 사회 추동의 원동력을 얻고 있다.
따라서 이들과 평화와 통일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줘야 한다는 게 이번 방북객들이 내린 결론이다.

S씨는 "아무리 나쁜 아버지일지라도 남이 내 아버지를 욕할 때 기분이 상하고 화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 김일성은 이들에게 아버지 이상의 존재이기에 사정은 더욱 그러하다"이라고 말했다.

사업가 C씨(40대)는 "그동안 양쪽이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숨기고 가린 것이 너무 많았다"면서 "이제는 통일을 위해 서로의 본 모습을 인정할 수 있는 아량이 생겨야 하겠다"고 말했다.

L씨는 "우리 당대는 어렵다고 해도 우리 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를 알려줘야 한다.
그들 마음 속에서 양쪽의 모든 것들이 녹여질 때 민족이 하나가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고 역설했다.

평양=이주형 기자 hyong@can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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