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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특파원의 방북취재기 <에필로그> '북한 가본 사람'이 '안 가본 사람'에게

[밴쿠버 중앙일보] 기사입력 2002/07/05 15:44

북한 인도자는 해외 한인

중간 글귀:
택시 집어타 '고향 가자' 했더니 '통행증 있냐'
"외화벌이 북한인 형제.조카처럼 안쓰러웠다"
"해외투자 신중해야...되려 북한 망칠 수 있다"

북한 방문 시리즈 기사의 후반부를 준비하던 중 뜻하지 않게 서해교전 소식을 접하게 됐다.
밴쿠버 한인들의 북한 방문 3일째 여정이 이어져야 할 대목에서 터진 이 사건으로 북한에 대한 시각이 다시금 얼어 붙었고 기자도 기사의 방향을 잡을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움을 숨길 수 없다.
특히 이날은 판문각 방문, 아리랑 축전 참관 등 체재 수호와 분단의 책임이 거론돼야 할 일정이 많아 논란의 여지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아직까지 한반도는 이념과 이데올로기의 대결장임을 새삼 확인하면서 장래라도 이 방북기의 후편이 이어질 수 있기를 기약해 본다.

다만 이번 방북 기간 중 한인들이 기자에게 들려준 말들을 모아 봄으로써 '북한을 가본' 사람들이 북한과 그 곳 사람들을 어떤 눈으로 보게 됐는지를 '안 가본' 이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북청이 고향이라는 D씨는 남몰래 사리원과 개성에서 두 번이나 흙을 퍼 담았다.
자신은 고향 땅을 밟아 보지 못했지만 한번은 절친한 선배를 위해, 또 한번은 장모를 위해 이렇게 채취한 흙을 정성껏 싸들고 북한을 나왔다.

또 해주에 어머니와 누이, 어린 동생들을 둔 채 아버지를 따라 홀홀 단신 월남했던 K씨는 평양에서 불과 1시간 거리도 안 되는 해주를 가기 위해 택시를 집어 탔다.
호텔 앞에 즐비하게 늘어선 것이 택시라는 것을 안 다음 기쁜 마음에 올라탄 그에게 운전사가 하는 말이 "통행증을 받아 오라"는 것이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을 딛고 택시에서 내린 그는 다음날 개성으로 남하하는 버스 안에서 줄곧 서쪽 고향 하늘만 내다봤다.

기자는 사실 방북 전, 50년 넘게 강제로 떨어져 살아야 했던 부모형제를 북한에 와서도 찾아가 보지 못하는 실향민들의 아픔이 격동치는 물결처럼 터져 나올 것이라 예상했었다.
행여 누군가의 돌출행동이 있지나 않을까, 오열의 현장을 목격하지나 않을까 하는 직업적인 근성이 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행 중에 이들이 보여준 슬픔은 지극히 절제된 것이었다.

아침 식당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는 밤새 흘린 눈물이 말끔히 닦여 있었고 하루 일정 내내 웃음기 어린 낯을 잃지 않았다.
기자 외에는 이들에게 월남하게 된 사연을 묻는 이가 없었으며 실향민들은 같은 처지임을 알면서도 서로들 말을 아꼈다.
들려주는 사연은 담담할 뿐 물기란 묻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이 애써 참았던 울음은 끝내 터지고 말았다.
출발 만 하루를 남기고 해외동포원호위원회 고위 당국자와 뜻하지 않게 만나는 자리에서 마음에만 담아두고 갈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통일, 통일, 남북이 하나 되자고 외쳐대지만 언행이 일치가 안 된다.
이렇게 먼 길을 돌아 온 사람들에게도 가족을 못 만나게 하면서 무슨 통일이냐... 오늘 아리랑 축제를 북의 가족들과 함께 봤다면 그것이 진실로 통일을 염원하는 사람들이 모습이 아니었겠는가."
"여기 오기 전에 가서 떼 쓸 것 같은 사람은 데려 오지 말라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민초다.
북에서도 민초로 살았기에 가족과 생이별하면서 월남했고 이남에서도 우린(월남자) 민초였기에 먼 타국 땅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같은 민초들은 고향 가는 것만을 꿈에 그리며 50년 넘게 살아왔다.
.. 관장하는 부서가 다르다, 건의해 보겠다는 식으로만 말하지 말라. 우리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린다면 행동을 보여 달라."
북한 당국자는 이 말들에 맞설만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안내원들의 표정도 엄숙해졌고 회의가 끝난 뒤에 종이를 나눠주면서 가족 명단과 고향 주소를 적어 달라고 했다.
"주소나 이름이 생각나지 않으면 고향 마을의 생김새를 그림으로 그려 주고, 생각나는 지명이나 그 밖에 단서가 될만한 것은 무엇이든 기입해 달라"며 "꼭 찾아서 연락해 주겠다"고 말했다.

우리 일행은 믿었다.
아니 달리 방도가 없기에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북의 가족을 찾으면 뭐하냐, 그토록 오래 떨어져 산 사람들에게서 무슨 가족의 정을 느낄 것인가', '북한은 그 가족을 이용해 해외 친지들에게 이것 보내라, 저것 보내라 귀찮게만 군다고 한다.
한번 찾은 가족을 그 후에 제대로 만나게 해 주지도 않으면서 이용해 먹으려고만 한다'는 등 어두운 측면을 들춰내는 말들에 대해 이들은 적어도 그 순간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후세대로 일가친척을 모두 남한에 둔 기자로서는 이들의 아픔을 이처럼 가까이서 접해 본 적이 없었다.
기자에게 북한은 '기아 사태' '탈북자' 등 언론보도 상의 낱말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함께 간 실향민들에게는 '내 형제와 조카들이 굶고 있으며 그런 나머지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북한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 지에 대한 이들의 생각은 구체적이면서도 따뜻했다.

S씨는 외화벌이에 혈안이 된 북한인들을 보면서 "내 형제나 조카처럼 안쓰럽다"고 말했다.

D씨는 해외 투자 없이는 북한의 경제를 끌어올릴 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국가 차원에서 지금 당장 뭔가를 할 수 없다면 해외에 나와 있는 실향민들이라도 각자의 고향으로 보내 달라. 자기 식구가 굶는데 투자하면 이익을 챙길 수 있을까 계산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또 이들의 눈은 신중해졌다.
좋고 나쁨을 따지기 이전에 북한 주민들이 주체사상을 진실로 신봉하고 김일성 부자를 진심에서 믿고 따를진대 이들에게서 이것들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만약 천박한 자본주의가 먼저 들어가 이들 삶의 근간을 파괴한다면 북한은 엄청난 정신적 공황에 빠져들고 사회 혼란이 초래될 것이다.
그들이 돈 맛을 알아 한꺼번에 휴전선 이남으로 몰려 내려 올 때 과연 남한이 그 부담을 떠안을 수 있겠는가, 양쪽이 함께 망하는 길이다.
그 전에 북한 당국자가 극단적인 결심을 할 지도 모른다.
"
"밖의 돈이 북한 경제를 살리는 것은 좋으나 오히려 망쳐 놓을 위험도 있다.
남한 자본이 들어간 뒤 변질된 연변의 조선족 사회가 그 실례다.
"
"아직까지는 비슷한 게 많아 한 민족임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점도 많다.
서둘러 휴전선을 터 버린다고 능사는 아닌 것 같다.
전쟁 위협이라도 우선 가신 상태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경제교류 하면서 서로의 발전을 꾀하다 보면 언제가 생활 수준도 비슷해지고 서로의 생각도 많이 이해되면서 자연스럽게 합쳐지는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
"
북한은 아직도 알 수 없는 나라다.
지난달 벌어진 서해안 교전사태가 무엇보다 이를 말해 준다.
올해도 수백만 톤의 곡식을 한국과 미국에 대부분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것도 학수고대 했던 대미관계 개선을 위해 미국이 대북 특사를 파견할 시점에 스스로 찬물을 끼얹었다.
누가 봐도 납득할 수 없는 점이고 응당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짧은 기간이나마 '북한'이란 형체 없는 허울이 아니라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온 밴쿠버 한인들은 북한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는 구석이 생겼다.
북한인들도 중국의 개방과 그 성과를 보고 있었고 자신들이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를 미국의 경제봉쇄에서 찾았다.
또한 백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사회와의 교류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체재 유지를 함께 생각해야 하는 북한 수뇌부의 고심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한인들 눈에는 이들이 그 답을 해외 한인들에게서 찾고 있는 듯 비쳐졌다.
한 주민은 "중국의 발전이 외국인들에게 받은 돈으로 이뤄졌다고 보면 오산이다.
화교의 경제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중국은 없었다"고 말했고, 북한 무역을 타진하러 간 한 교민에게 고위 관료가 3명이나 찾아 왔었다.

긴 세월 홀로 살아온 사람들이라 신뢰 없이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이들에게 해외 동포는 믿고 싶은 첫 상대일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당신들이 안내원이 돼 우리를 밖으로 인도해 달라'는 무언의 암시를 받고 북한을 떠나는 한인들의 마음은 그래서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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