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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20/20] 흑백갈등과 '무고한 죄'

김완신/논설실장

2006년 영국에서 설문조사를 통해 '모든 성인들이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30권을 선정했다. 조사에는 박물관·도서관·기록보관소 관계자들이 참여했다. 3위는 '반지의 제왕'이, 2위에는 성경이 랭크됐다. 이 조사에서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경을 앞서 1위에 오른 책은 미국작가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였다. 1960년 출간돼 퓰리처상을 받은 이 소설은 지금도 미국 고교생들이 가장 많이 읽는 고전 중 하나다.

'앵무새 죽이기'는 1930년대 대공황을 배경으로 남부의 작은 도시에서 벌어지는 인종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소설은 스카우트라는 한 소녀가 마을에서 발생한 흑백간 성폭행 사건을 담담히 서술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백인 처녀의 집일을 도와주던 흑인 청년 톰 로빈슨이 처녀를 성폭행했다는 혐의로 체포된다. 백인 처녀가 톰을 유혹한 사실을 알게 된 여자 아버지가 거짓으로 톰에게 성폭행 혐의를 씌운 것이다.

정의롭고 도덕적인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스카우트 아버지)가 톰을 변론한다. 핀치는 사건 정황과 증언을 통해 흑인 청년의 무죄를 입증하지만 백인 중심의 배심원은 톰에게 유죄를 평결한다. 결국 톰은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총에 맞아 죽는다. 30년대 남부의 뿌리깊은 인종차별과 편견이 죄없는 톰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지난 13일 플로리다주 제18순회법원은 흑인소년 트레이본 마틴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던 히스패닉계 백인 조지 지머먼에게 무죄평결을 내렸다. 작년 2월 자경단원으로 근무했던 지머먼은 편의점에 들렀다가 귀가하는 마틴과의 싸움 중에 생명의 위협을 느껴 총으로 살해했다. 5명의 백인 여성과 히스패닉 여성 1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지머먼이 살해위협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한다며 무죄를 평결했다. 다만 대처 과정에서 지머먼이 판단을 잘못해 인명을 살상하게 됐다고 밝혔다.

지머먼의 평결소식이 전해지면서 흑인사회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은 비무장 소년을 살해한 것은 정당방위가 아니라 명백한 살인이라고 주장한다. 전국적으로 시위가 끊이지 않고, 평결 1주일을 맞는 이번 주말에는 흑인 인권운동가 앨 샤프턴 목사가 주도하는 대규모 시위가 예정돼 있다. 여론이 악화되자 연방법무부는 미국시민으로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규정한 민권법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지머먼을 기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앵무새 죽이기'의 배경이었던 1930년대에서 거의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미국내 흑백갈등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과제로 남아있다. 흑인 대통령 시대에도 인종문제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오바마 대통령도 처음 사건을 접하면서 지머먼의 살해동기 중 하나가 숨진 소년의 후드티 착용이었다는 점을 의식해 '내게 아들이 있었다면 그도 후드티를 입었을 것'이라고 언급했지만 평결 후에는 '냉정하게 법원의 결정을 따라 줄 것'을 당부했다.

지머먼 사건은 법이 만들어 놓은 잣대에 의해 면죄부를 받았지만 정당방위인지 살인행위인지는 명확히 단정할 수 없다. 여러 정황이 인종차별적 선입관을 갖게 해 객관적 인 판단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희생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희생의 이유가 피부색이 다르다는 '무고한 죄' 때문이어서도 안 된다. 소설에서 핀치 변호사는 아이들에게 공기총을 선물하며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는 앵무새를 죽이는 것은 죄'라고 말한다. 톰과 트레이본은 앵무새가 되어 떠났다. 이제 앵무새 죽이기를 끝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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