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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바라본 사람과 교육] 한국 향한 일편단심…새미 리 박사

[LA중앙일보] 발행 2013/07/22 미주판 27면 기사입력 2013/07/21 19:34

그레이스 리 원장/C2에듀케이션 토런스

오는 8월 LA에 새미 리(사진) 박사의 이름을 딴 Dr. Sammy Lee Elementary가 개교한다.

찰스 H. 김 초등학교'와 '김영옥 중학교'에 이어 3번째 한국인의 이름을 딴 학교며 특히 생존 인사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한다. 이는 바로 새미 리 박사가 살아온 인생 궤적이 얼마나 귀감이 되며 한국인과 미국인의 긍지를 높여주는 것인지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뉴욕 타임스는 한국계 미국인(Korean American)인 새미 리를 가장 '미국인다운 미국인'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미국사회에 기여한 롤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다. 수많은 이민자들이 여러 나라로부터 와서 살고 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면서 당당한 미국인으로 귀감이 되기는 쉽지 않다. 리 박사는 1920년 캘리포니아 프레즈노에서 한국에서 이민 온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일제 아래서 하와이로 끌려와 사탕수수 이민노동자로 타국의 삶을 시작했다.

노예와 다름없는 삶을 살았던 부모는 어린 리 박사에게 철저하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일제의 무자비한 침략과 탄압을 주지시켰다. 1900년대 초 미국으로 이민 와 온갖 차별을 받았던 아버지는 의사와 같은 직업을 가져야만 사회에서 존경받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아들에게 의사가 될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아들은 수영선수가 되고 싶었다. 그 당시는 동양인이나 흑인에겐 1주일에 한번 만 수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며, 황인종이나 흑인이 수영장을 다녀간 후에는 수영장 물을 교체할 정도로 인종차별이 심했었다. 이와 같은 극심한 인종차별도 수영과 다이빙을 향한 소년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수영 중에서도 다이빙이 소년에겐 가장 큰 매력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아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아버지의 꿈을 버릴 수 없었던 그는 잠시 다이빙을 접고 의대에 들어갔다. 의사가 된 뒤에도 그는 올림픽의 꿈을 접지않았다. 꾸준한 연습으로 오직 실력만이 인정받을 수 있는 스포츠의 세계에서 드디어 그는1948년 런던 올림픽 다이빙에 출전, 플랫폼에서 금메달, 스프링보드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미국에서 아시아계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딴 선수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도 출전, 다시 플랫폼에서 금메달을 따며 올림픽 다이빙 사상 최초의 2회 연속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당시 사회적인 인종차별이 오히려 그에겐 더 큰 동기부여가 된 것같다.

그렇게 다이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던 그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의관으로 자원 입대하여 전장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리 박사는 또한 그가 갖고 있던 스포츠계의 영향력을 십분 활용해서 동계올림픽을 평창에 유치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1964년 도쿄올림픽 때 당시 새미 리 박사는 미국선수단의 코치였고 국제심판이었지만 미국선수단 보다 2주일이나 먼저 일본으로 가서 자비를 써가면서 한국선수들과 코치들을 지도했다. 부모의 나라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한국인이라는 본인 스스로의 철저한 정체성을 확고히 했기에 가능했다.

새미 리박사는 다이빙 코치의 전설로 통한다. 그로부터의 지도는 '금을 낳는다'란 말이 있을 정도다. 1984년 LA,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연속해서 금메달을 획득한 '그레그 루가니스'가 바로 새미 리 박사의 제자이다. 한국인들이 새미 리 박사를 존경하는 이유는 집념으로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고 승리한 스포츠 정신을 뛰어 넘어 한국인으로서 조국에 대한 그의 사랑을 우리가 느끼고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문의:(310)540-6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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