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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어머니 이름은 고영희 아닌 ‘고용희’ 확인”

[조인스] 기사입력 2013/08/08 10:00

‘ 김정일의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의 재방북 후 첫 인터뷰
“김정은 성형수술은 웃기는 소문…장성택은 절대적인 ‘넘버 투’

김정일 마지막 부인 ‘옥이동지’와 관계는 좋은 듯”

1988~96년, 1998~2001년 두 차례에 걸쳐 11년간 북한에 머무르면서 북한 최고지도자의 내밀한 생활을 목격했던 후지모토 겐지. 흔히 ‘김정일의 요리사’로 잘 알려진 그가 탈북 후 11년 만인 지난해 7월과 8월 김정은의 초청으로 다시 북한에 다녀왔다.

방북 후 후지모토 겐지는 이때의 이야기를 담은 책 <찢어진 약속> 출간과 방송 출연 등을 통해 북한의 최근 사정을 소개했다. 필자는 지난 4월 일본 지인의 소개로 후지모토 겐지와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후지모토 겐지는 그동안 방송이나 책에서도 언급하지 않았던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

그는 최고 권력자인 김정은의 가족과 측근 이야기부터 ‘제 2인자’로 평가받는 장성택 등 북한 최고 권력층의 움직임을 들려줬다. 후지모토 겐지의 이야기를 통해 최근 큰 변화를 겪고 있는 김정은 정권의 내밀한 부분을 들여다보았다고 월간중앙이 보도했다.

2000년대 초 북한 외부 세계에서 김정일의 3남 김정은의 존재조차 잘 모를 때 김정은이 어떠한 성격과 자질을 갖췄는지 가장 먼저 소개한 인물은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였다. 후지모토 겐지는 1988~96년, 1998~2001년 두 차례에 걸쳐 김정일의 요리사로 11년간 일하면서 여러 차례 김정은을 만났던 사람이다.

그 과정에서 소년 김정은이 갖고 있는 북한의 미래에 대한 고민도 직접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그는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어느 전문가보다 먼저 김정은이 후계자가 되리라고 예견했다. 그의 예견은 적중했다.

필자가 후지모토 겐지를 처음 만났던 것은 2008년 12월 도쿄(東京). 2006년 초부터 이메일을 통해 북한 후계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우정을 쌓은 일본 <주간현대>의 곤도다이스케(近藤大介) 부편집장이 주선해 출장기간 중에 그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후지모토 겐지가 쓴 책을 그 전에도 여러 번 읽었지만, 당시 그가 들려준 김정은에 대한 이야기야말로 필자가 김정은의 자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지난해 7월 북한당국의 초청을 받아 11년 만에 재방북한 후지모토 겐지가 베이징공항을 출발하기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고 있다.<br><br><br>

지난해 7월 북한당국의 초청을 받아 11년 만에 재방북한 후지모토 겐지가 베이징공항을 출발하기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고 있다.


덕분에 필자는 2009년 초부터 북한 내부에서 은밀하게, 그러나 본격적으로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김정은이 어떠한 인물인지 국내의 여느 전문가보다 깊이 있는 분석을 제시할 수 있었다. 나아가 김정은과 장성택의 관계, 김정일의 마지막 부인인 김옥의 실제 위상과 영향력 등 그동안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공개하기도 했다. 2008년 그 만남이 필자의 북한 후계문제 연구에 큰 도움을 준 셈이다.

후지모토 겐지가 건넨 놀라운 그림 한 장

그 후 필자는 두 차례 더 일본에 갈 기회가 있었지만, 후지모토 겐지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다 지난 4월 곤도 다이스케 부편집장의 주선으로 다시 도쿄에서 그를 다시 만나 2012년 7월과 8월 방북과 관련해 장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그동안 김정일의 부인으로 생시에 북한에서 국모 혹은 퍼스트레이디로 간주됐던 김정은의 어머니 이름이 지금까지 알려진 ‘고영희’가 아니라 ‘고용희’라는 점이다.

김정은의 어머니 이름이 고영희든 고용희든 무슨 상관이냐고 되물을 수 있다. 그러나 김정일의 부인으로서 북한에서 퍼스트레이디 대우를 받았고 제2인자에 해당하는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의 이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 대북 정보력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에 매우 충격적인 일이라 하겠다.

2009년 여름까지만 해도 한국과 국제사회에서는 김정일의 3남 이름을 ‘김정운’으로 잘못 알았다. 그러다 대만의 한 사진 작가가 2009년 9월 원산 근교에서 찍은 김정은 선전벽보 사진이 공개되면서 비로소 김정운이 아닌 김정은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그래서 당시 우리 정부의 대북 정보력이 도마 위에 오른 적이 있다.

지난 4월 23일의 면담에서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은의 어머니 묘를 직접 그린 그림을 필자에게 ‘선물’로 줬다. 그런데 그 그림 속의 묘비명에는 고영희가 아니라 고용희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혹자는 후지모토 겐지의 한국어 실력이 서툴러 고영희를 고용희로 잘못 옮겨 쓴 것 아니냐고 의심할 것이다. 물론 후지모토 겐지의 한국어 회화 실력은 초보적 수준이어서 대화는 그가 일어로 말하면 한국어에 익숙한 곤도 부편집장이 통역해주는 식이었다. 그러나 후지모토 겐지는 자신의 저서를 건네면서 매번 내 이름을 정확히 옮겨 쓸 정도로 필기 능력에는 문제가 없다.

고용희는 김정일과 동거하기 전 만수대예술단 배우로 무용 실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이 1972년 12월 29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으로 ‘공훈배우’ 칭호를 수여한 만수대 예술단 배우 가운데 고용희라는 이름이 나온다.

당시 중앙인민위원회는 “불후의 고전적 명작 <꽃 파는 처녀>를 잘 살리면서 훌륭하게 각색함으로써 예술영화 <꽃 파는 처녀>를 가장 혁명적이며 인민적이며 사실주의적인 기념비적 영화로 만드는데서와 혁명가극 <꽃 파는 처녀>를 <피바다>식 혁명가극 창작의 제 원칙과 형상 방도를 더욱 심화 발전시킨 걸출한 대작으로 만드는 데서 특출한 공훈을 세운 예술인들에게 공훈배우 칭호를 수여한다”고 밝혔다.

김정은의 어머니 이름이 1972년 고용희였고 현재 묘비에도 고용희로 적혀 있다면 고용희가 원래 이름이고, 고영희는 잘못 알려진 이름으로 봐야 할 것이다.

고용희의 묘비에는 그가 1952년 6월 26일 출생한 것으로 새겨져 있다. <데일리NK> 도쿄지국은 지난해 취재를 통해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찾아냈다. 어린 시절 일본에서 고용희의 이름은 ‘고희훈’, 일본식으로는 ‘다카다 히메(高田姬)’였다는 점이다.

당시 <데일리NK>가 찾아낸 고희훈의 생년월일은 1952년 6월 26일로 고용희의 묘비에 적힌 날짜와 일치한다. 일본정부 기록에 따르면 고희훈의 국적 주소는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로, 출생지는 ‘오사카시 텐노지구 후나바시초 75(大阪市天王寺?舟橋町75)’로 돼 있다.

‘귀국자’ 신분 어머니는 김정은의 아킬레스건

<데일리NK>의 취재에 따르면 고용희의 부친 고경택은 일제강점기 일본육군이 직할했던 히로타(廣田)재봉소에서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경택은 한국과 일본을 왕래하는 밀항 선박을 운영했던 것이 탄로나 일본에서 강제퇴거 명령을 받았고, 결국 1962년 북한으로 넘어갔다.

고경택의 딸 고용희가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한 후 만수대예술단에서 무용수로 활동하다 1972년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으니 고경택은 성공한 ‘귀국자’에 해당하는 셈이다. 북한당국은 귀국자인 고경택이 북송 후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선전하기 위해 대외선전용 잡지인 <조선화보> 1973년 3월호에 고경택의 수기를 실었다.

이 수기에서 고경택은 “어버이 수령님의 품에 안긴 ‘영자’는 원하는 대로 공짜로, 그리고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음악무용대학을 졸업했으며 이제는 공훈배우로서 훌륭히 활약하고 있다”고 적었다. 이처럼 고경택의 수기에 고용희는 영자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고희훈(다카다 히메)은 나중에 이름을 바꿔 북송 무렵에는 ‘고영자’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영자가 일본식 이름이어서 김일성·김정일 지시에 따라 다시 고용희로 개명한 것으로 파악된다.

<데일리NK> 보도에 따르면 <조선화보> 1973년 하반기호에는 고용희로 추정되는 인물이 그해 8~9월 일본을 방문해 공연한 사실이 사진과 함께 소개됐다. 이 화보에는 고용희가 ‘귀국자’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그가 북송되기 전 사용했던 고영자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977년 10월 고경택도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의해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노력영웅’ 칭호를 받는다. 딸은 공훈배우, 아버지는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으니 고용희 집안은 귀국자 중에서도 대표적 성공 케이스인 셈이다. 김정일이 고용희와 동거를 시작한 시기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린다. 다수의 언론은 1976년께부터 김정일이 고용희와 동거했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비교적 신뢰할 만한 소식통은 1981년 고용희에게서 김정철이 태어난 후 동거를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후지모토 겐지의 그림을 보면 고용희의 묘비에는 그녀가 2004년 5월 24일 사망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동안 다수의 언론은 고용희가 2004년 6월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필자는 신뢰할 만한 정보에 의거해 2005년부터 북한 후계문제 관련 논문 발표를 통해 고용희가 2004년 5월 말에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필자가 의존하는 정보가 항상 100%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정도의 신뢰도를 갖췄음이 확인된 셈이다. 고용희가 성공한 귀국자에 속함에도 귀국자에 대한 북한사회의 편견 때문에 김정은은 자신의 어머니가 귀국자임을 밝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정은이 앞으로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한 후 고용희의 출생지를 있는 그대로 공개할지 아니면 김정일처럼 북한에서 출생한 것처럼 ‘세탁’할지 관심을 끈다.

후지모토 겐지와 나눈 이야기 중에는 김정은의 매제 장성택, 김정일의 마지막 부인 김옥, 그리고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의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도 있었다. 다음은 4월 23일 오후부터 후지모토 겐지와 나눈 주요 대화 내용이다.

김정은이 어렸을 때 대장 군복을 입은 것을 언제 보았나?

“내가 김정은을 처음 보았을 때 정은이가 일곱 살, 정철이가 아홉 살이었는데, 그때 어린아이들이 군복을 입은 것을 보고 놀랐다. 왕자들이 왜 군복을 입었나 생각했다.”

김정은이 그 이후에도 계속 군복을 입었나?

“그때만 입었다. 계속 입지는 않았다.”

수기에서 정은이를 ‘왕자’라고 표현했는데 간부들도 정은이를 왕자라고 불렀나?

“아니다. 그것은 내 생각이다. 간부들이 당시 정은이를 ‘작은대장동지’라고 부르고, 정철이는 ‘큰대장동지’라고 불렀다. 그런데 정은이가 아홉 살 10개월 때 여정이가 정은이에게 ‘작은오빠’라고 부르자 정은이가 ‘왜 내가 작은 존재인가’ 하며 화를 내는 것을 보았다.

정은이가 ‘작은’이라는 표현을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작은대장동지’라고 부르지 않고 ‘대장동지’라고 불렀더니 정은이가 매우 만족해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김창선 부부장에게 했더니 ‘그러면 우리도 대장동지라고 부를까’하는 반응을 보였고, 그 이후부터 간부들이 김정은을 ‘대장동지’라고 불렀다. 김정철은 계속 ‘큰대장동지’라고 불렀다.”

김정은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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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일부 전문가는 장성택이 섭정하면서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하는데, 북한에서 본 장성택의 위상은 어떠했는가?

“내가 보기에 김정은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권력도 있고 친한 관계다.”

장성택을 여전히 제2인자로 생각하는가?

“절대적인 ‘넘버 투’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을 빼면 넘버 투 후보는 없다. 장성택 아래 사람들은 숙청이 있었지만 장성택은 숙청이 없었다.”

일부 전문가는 김정은이 할아버지 김일성과 비슷해 보이기 위해 성형수술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김정은의 과거 모습을 본 사람으로서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웃으면서)성형수술할 필요가 없다. 여자도 아닌데…. 성형수술은 웃기는 소문이다.”

11년 만에 김정은을 다시 보았을 때 외모는 어떻게 변했던가?

“골격이 튼튼해지고 어른다운 분위기가 느껴졌으며 헤어스타 일이 바뀌었다.”

그 전에 김정은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였나?

“2001년 4월 24일이다.”

지난해 7월 리설주를 만났을 때 임신상태였을 텐데, 임신했다는 느낌이 들었나? 임신이나 자녀 이야기는 없었나?

“임신 3개월 정도여서 별로 (임신한) 인상이 없었다. 무척 아름다운 사람이다. 임신이나 자녀 이야기는 없었다. 지난해 북한에 간 것은 김정은에게 2011년에 다시 돌아가기로 한 약속을 11년 만에 지키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7월 북한에 다녀온 후 김정은에게 연락받은 것은 전혀 없나?

“없다. 올해 다시 가보고 싶다. 그래서 정은 씨에게 편지를 썼다.”

김여정도 오랜만에 다시 만나지 않았나?

“만났는데 같이 찍은 사진은 없다. 김여정은 아직 대학생이다. 여학생처럼 카메라를 좋아한다. 성격도 활달하다. 7월 27일 전승기념일 모란봉극장 공연에 김여정이 늦게 도착했다. 같이 공연을 보았다. 당시 빈자리가 두 개 있어 김정은과 리설주가 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여정이 남학생들에게 김정은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일의 마지막 부인 김옥도 만났나?

“옥이동지와 건배도 했다. (김옥이) 정말 예쁘다.”

사진으로 봐서는 김옥이 그렇게 예쁜 것 같지 않던데?

“사진보다 훨씬 낫다. 사진은 거짓말이다. 지난해 7월 21일 베이징(北京)에서 평양으로 들어가던 날 베이징공항에서 오랜만에 옥이동지를 우연히 만났다. 그래서 ‘야~, 옥이동지 아닙니까’ 하고 인사했다. 당시 평양으로 들어가는 비행기가 두 대 있었다. 옥이동지가 먼저 들어가는 비행기를 타고, 내가 그 다음에 들어가는 비행기를 타고 같은 시간에 평양으로 갔다.

지난해 7월 21일 베이징에는 60년 만에 큰 비가 내려 77명이나 홍수로 죽었다. 베이징공항에서 많은 비가 와서 라운지에서 계속 기다리면서 라면을 먹다 우연히 김옥 동지를 만났다.”

김옥이 김정일의 마지막 부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북한 간부들의 김옥에 대한 대우는 어떠했나?

“김정은을 만났을 때 김정은 오른쪽에 부인 리설주가 앉았고, 그 옆에 김옥이 앉았다. 북한 간부들이 김옥에게 부인이나 사모님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김옥 동지가 아니라) 여전히 ‘옥이동지’라고 부른다. 김정은과 김옥의 관계는 좋았다.”

지난해 한국 방송의 취재에 응했다 취소한 것으로 안다.

“지난해 한국의 한 방송사가 80만 엔을 주고 3일간 한국에 초청하겠다고 해서 승낙했다가 3일 전에 취소했다. 한국 방송의 취재에 응하면 북한으로부터 배신자로 취급받을까 두려워 지난해 방북 이후로는 한국 언론과 인터뷰한 적이 없다. 지금은 남북관계가 좋지 않으니 한국 방송과 인터뷰하지 않겠지만 관계가 개선되면 적극적으로 응할 생각이다.”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나?

“그렇다. 몇 년 전 한 방송사 초청으로 이틀간 방문한 적이 있다.”

아들은 언제 사망했나?

“지난해 7월 6일, 방북 직전에 사망했다.”

아들이 왜 갑자기 사망했나?

“돌연사였다. 엄정녀(부인)가 친정부모 댁에서 살았는데 그 집에 방이 두 개 있다. 한 방에서 엄정녀와 아들·딸이 같이 살았다. 새벽 2시께 갑자기 자던 아들이 일어나 ‘와~’ 하고 세번 소리지르고는 심장마비로 돌연사했다. 그것이 엄정녀의 설명이다. 아들이 고기를 좋아해 고기를 먹고 싶다고 자주 말했다. 현재 엄정녀는 부모와 딸 4명이 매우 좋은 아파트로 이사해 산다. 엄정녀는 1967년 10월 26일생. 만 45세. 나와 20년 차이가 난다.”

달라진 평양, “만수대 부근까지 아파트 들어차”

11년 만에 다시 본 북한에 대한 인상은 어떠했나?

“옛날에는 만수대 주변에 아파트가 없었는데, 지난해 갔을 때는 아파트가 많이 생기고 상점도 많이 늘어났다.”

방북기간에 주로 평양에만 있었나?

“그렇다.”

평양에서는 어디어디를 방문했나?

“김정일이 만든 사과농원을 방문했다. 정말 넓다. 나무 하나 하나에 망을 씌워놓았다. 망을 만드는 공장도 농원 바로 옆에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생시에 사과를 좋아해 ‘사과를 하루 1개씩 먹으면 의사가 필요없다’고 말하고는 했다. 그 중에서도 일본 후지(富士) 사과가 제일 맛있다면서 후지 사과를 주로 먹었다. 포도주는 프랑스 보르도산을 주로 마셨다.

1994년 핵 위기 때는 김일성 사망 전 서기실의 리명제 실장, 최일 부부장과 함께 이란으로 가서 캐비어 구입계약을 했다. 계약에 3일 걸렸다. 돼지고기는 덴마크산을 수입해 먹었다. 귀국 전에는 고려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식사했다.”

김정일 집무실에 대한 기억은?

“김정일 집무실에는 전화기가 두 대 있었다. 한 대는 김일성의 전화를 받기 위한 전화였다. 김정일은 김일성을 ‘대원수님’이라고 불렀다. 다른 전화기는 수화기를 들고 휘파람을 불면 교환원이 (김정일인 줄) 알아차리고 원하는 전화로 연결해줬다.”

김정은의 어머니 이름은 고영희가 맞나, 고용희가 맞나? 1972년 12월 <로동신문>을 보면 고용희라는 만수대예술단 배우가 김일성으로부터 공훈배우 칭호를 받은 것으로 나온다.

“지난해 김정은의 어머니 무덤에 세 번 갔다. 그런데 묘비에는 고영희가 아니라 고용희로 적혀 있었다. 고용희가 진짜 이름이다. 그런데 고용희가 아홉 살까지 일본에서 자랐음에도 내게 일본어를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과거 발간한 책에서는 고영희라고 표기하지 않았나?

“(일본어에는 모임이 아·이·우·에·오밖에 없기 때문에) 일본인은 고용희라는 이름을 듣고 고영희와 고용희를 구별하기 힘들다.”

고용희의 무덤에는 어떻게 가게 됐나? 누가 같이 가자고 해서 갔는가?

“과거 평양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김창선 서기실 부부장을 베이징으로 오라고 요청해 베이징에서 만났다. 김창선이 ‘공화국에 돌아오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어 ‘장군님’ 동상에 가고 싶다고 말한 다음 ‘사모님’ 묘에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김창선 씨가 꽃다발을 베이징에서 구입할 것인지 평양에서 구입할 것인지 물어 베이징에서 구입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베이징에서 꽃다발 두 개를 사서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벤츠를 타고 꽃다발 하나는 장군님 동상에 또 하나는 고용희 사모님 무덤에 드렸다.”

(후지모토 겐지가 고용희 묘지를 직접 그린 그림을 선물로 준 데 대해) 고맙다. 이것을 공개해도 되나?

“문제없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후지모토가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 뵙고 싶어한다고 전해달라. 박 대통령이 평양에 가기 전에 조언이 필요하다고 하면 언제든지 서울로 가겠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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