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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업] 원주 기독병원의 추억

수잔 정/소아 정신과 전문의

나는 강원도를 사랑한다. 의대 재학중에 무의촌 진료대로 가서 만난 정선 사람들의 순박한 마음씨가 시초였다. 그 후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녀온 강릉의 경포대와 푸른 바다, 붉은 감이 익어가는 기와집들에 마음을 빼앗기곤 하였다.

그러나 가장 깊은 의미를 심어준 곳은 원주였다. 원주기독병원에서 2년간 내과 수련을 받으며, 나는 첫딸을 낳았다.

최근에 읽은 '리턴 투 코리아(Return to Korea)'라는 책에서 강원도를 다시 만났다. 48년간 의료 선교로 한국 의료계의 초석을 닦은 캐나다 여의사 플로렌스 머레이의 회상록이다.

1921년에 감리교 의료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온 그녀는 함흥 지역에서 활발한 의료 봉사를 하며 국내 최초의 결핵 요양소를 세웠다. 조선을 위해 헌신한 그녀는 결국 일제에 의해서 1942년에 강제 송환되고 말았다. 해방되기 3년 전이다.



그녀는 1947년에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6·25 전쟁의 참화를 자신의 몸으로 당하면서 이북에서 내려온 난민들, 부모를 잃은 고아들, 거제도에 갇혀있던 수많은 포로들을 돌봤다. 내가 수련의 생활을 했던 원주기독병원도 그때 그녀에 의해 세워졌다.

그 당시 겪은 많은 이야기들이 책에는 눈물겹게 기록되어 있다. 다 부서진 병원 안에서 간호사들과 똑같은 식사를 하던 그녀는 서양식 식사를 하기 위해 근처의 미군 부대를 방문하곤 했다.

그녀가 군부대 출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한 동역자가 그녀를 찾아왔다. 현재 함흥병원에서 150명의 고아를 돌보고 있는데 아이들이 못먹어서 병이 잘생기니 군인들의 식탁에 남은 음식물을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도록 군부대에 부탁해 달라고. 그 후에 부대 장교의 알선으로 남은 음식뿐 아니라 부엌에 남아있던 신선한 재료들도 함께 제공해줬다는 일화도 있다.

그녀가 원주를 찾아간 이유는 간단했다. 전쟁으로 집과 일터를 잃어버린 한국인들 중에서도 높은 산에 둘러싸인 강원도인들의 가난과 질병이 더욱 절박해 보였기 때문이다. 원주에 내려가자마자 시작한 의료 행위는 나환자들이 모여 사는 외딴 곳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대부분 더운 남쪽 지방에 많이 퍼져있는 나병환자가 북쪽 지방인 원주에 유독 몰린 이유를 그녀는 나중에야 알아내었다. 원주에 있는 어떤 사람이 나병을 고칠 특별한 비법이 있다고 선전을 해서 많은 환자들이 집과 논밭을 팔고서 찾아왔다가 다시 돌아갈 집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면서 그대로 원주에 주저앉았기 때문이란다.

그녀는 나환자의 집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꼭 한 달 분씩만 약을 제공하였다. 많이 주면 팔아버리는 경우가 많을뿐더러 빨리 나으려고 한꺼번에 다량을 섭취하여 심한 부작용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닥터 머레이가 일흔 살이 될 때까지 헌신하였던 원주 기독병원은 이제 모교의 자매 병원이 됐다.

6·25 전쟁이 끝난 후 6년간 그녀가 헌신적으로 일하며 세웠던 원주 기독병원을 더 새로운 마음으로 찾아갈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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