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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97세 한규례 할머니의 마라톤 '신기록'

구혜영·사회부 기자

14일 사랑나누기 5K 마라톤에는 97세 할머니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기록은 모든 참가자들이 경기를 마치고 난 후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꼴등(?)은 확실하다. 예상대로다.

2시간40분이 넘어 결승선 인근에 도착한 한 할머니는 아들이 미리 받아온 메달을 마다하며 "여기가 결승선 아니야. 나중에 달라"며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달릴 것"이란 각오를 내비쳤다.

위글은 2주 전, 사랑나누기 5K 마라톤에서 포착한(?) 열정의 순간이다. 지면 사정으로 신문에서조차 탈락한 한규례 할머니의 이야기다. 이날 마라톤에는 세대와 인종, 장애를 뛰어 넘어, 3000여 명이 참가했다. 3회째를 맞이하는 이 대회에는 영부인 미셸 오바마가 이끄는 아동 비만 퇴치 운동 '렛츠 무브'와 유명 정치인사, 라티노 장애인 단체 등이 한 자리에 모여 나눔을 실천했다. 이 할머니가 이 많은 사람 중 유독 눈에 띈 이유는 처음부터 단 하나였다. '97'이라는 나이. 할머니가 출발한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언제쯤 돌아올까'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순전히 최고령 참가자를 찾겠다는 것 빼고는 큰 의미는 없었다.

지치기 시작한 건 오히려 이쪽이었다. 할머니가 대회 폐막을 알리는 소리에도 결승점에 도착하지 않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들인 이강열 이지러너스 마라톤 동호회장을 찾아가 할머니의 위치를 묻기 시작했다. 그 역시, 걱정이 돼 윌셔대로 이곳저곳을 뒤지던 상태였다. 서로서로 '워커 끄는 할머니'를 찾아나서기 20여 분, 이 회장으로부터 할머니의 위치를 알았다는 연락을 받고 뛰어갔다.



할머니는 만난 건 결승점으로부터 4블록 떨어진 킹슬리 인근. 할머니는 허겁지겁 달려온 아들에게 시큰둥한 표정으로 "뭘 걱정해?"라는 말을 건넸다. 손자와 함께 느릿느릿 워커를 끄는 할머니는 결승점이 이미 닫혔다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발을 옮겼다. 그러면서 마라톤 참가 이유를 묻는 나의 질문에 그는 "참 예쁘네. 젊을 때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해"라는 동문서답을 남겼다.

감동은 이때 밀려왔다. 할머니가 메달을 거부하며 걷기 시작한 것. 신문에 낼 거니까 메달 걸고 사진 한 장만 찍자고 애걸복걸(?)해도 그는 "아직 끝난 것도 아닌데 왜 메달을 받아?"라며 싫다고 했다. 이미 대회장은 무대 해체작업이 시작된 상태. 할머니는 양옆에 아들과 손자를 벗삼아 걸어갔다. 끝까지.

묻혀버린 이날의 기억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할머니의 웃는 얼굴과 꼴등인데도 '우승'한 것 같은 자신만만함이 좋았다. 할머니는 롱비치·오렌지카운티 마라톤 등에 나가서 매번 꼴등을 하는데도 다음해에 또 나가, 기록을 갱신한다고 했다. 갱신을 해도 기록은 여전히 꼴찌다.

1등만 기억하는 대회, 숫자로만 모든 것을 평가하는 사람에게 할머니의 기록은 하찮을 수 있다. 하지만 할머니는 누가 뭐래도 우승자다. 97세라는 세월의 셈이나 기록은 절대적 평가 기준이 되지 못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숫자가 아니라 온도로 기억된다. 열정(熱情)과 열심(熱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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