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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음악 산책] 이민100주년과 안익태

 1903년 1월, 100여명의 선조들이 제물포를 떠나 낯설고 물설은 하와이에 도착한지 어느새 100년이 지났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미 전역의 한인들이 여러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다. 필자의 경우 이 시점에서 꼭 열었으면 하는 음악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안익태선생의 ‘한국환상곡’ 연주회다.

 1906년 안창호, 안중근 등 애국지사를 많이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평양 숭실학교를 다니다 3.1운동과 연루되어 퇴학을 당한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첼로를 배운다. 1932년에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이어 신시내티 교향악단의 첼로주자가 되었다. 명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와 교분을 맺기도 했다. 34년에는 헝가리로 건너가 졸탄 코다이에게 배웠다. 빈에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밑에서 수학했다. 후르트뱅글러, 마스카니, 토스카니니, 카라얀 등과도 교제했다.

 그는 교향시 (강천성악, 논개), 교향곡 (파스토랄) 등의 기악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특히 환상곡 ‘한국’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곡은 ‘애국가’를 정점으로 하고 있어 한국인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곡이다.

 한국환상곡이 작곡되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선생이 미국 유학중 샌프란시스코의 한 한인교회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애국가 가사가 구슬픈 스코틀랜드의 민요 ‘올드랭사인’의 멜로디로 불려지는 것을 듣게 되었다.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만도 서러운데 국가(國歌)까지 남의 민요에 더부살이 하는 게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됐다.



 이에 그렇듯한 국가를 작곡하고자 생각하던 차, 1935년 뉴욕의 카네기홀 작곡 콩쿠르에 응모를 해 입선한 곡이 바로 한국환상곡이다. 초연은 1938년 영국 더블린에서 아일랜드 국립교향악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한국에서는 1960년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곡이 연주됐다.

 교향적 환상곡 ‘한국’은 우리 민족의 수난과 영광을 그린 대서사시며 조국에 대한 그의 충성심과 애정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수정을 거듭한 곡의 최종본은 총6부-아름다운 강산의 개국, 평화롭고 소박한 생활, 일제에 의한 민족 수난기, 독립의 쟁취, 한국전쟁에 의한 시련의 장송곡, 국가의 재건-로 구성된다. 특히 광복과 재건을 그린 부분에서는 애국가가 두번 등장하는데 더욱 뿌듯한 것은 이 가사가 한국어로 불린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례는 초연이 열렸던 영국의 더블린에서부터 예외가 없었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음반에서도 서툰 한글발음으로 “동해물과 백두산의” 유구성을 노래하는 미국인 합창단의 애국가를 들을때마다 벅차게 밀려오는 진한 감동을 결코 피할 수가 없다.

 분명 안익태선생이야 말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였다. 동시에 이국땅을 돌아다니며 음악을 통해 한국을 알린 애국지사이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한국인에게 있어서 결코 음악 자체로 평가되어서는 안된다. 비록 니체의 철학이 담긴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보다 음악적으로 조금 떨어질지는 모르지만 그는 확실한 나름대로의 애국 철학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속에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곡을 듣는 우리에게 선생은 말하는 것 같다. 음악속에 녹아있는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더욱 하나되고 긍지있는 민족을 건설해야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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