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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우의 고전문화산책] 부활과 음악 

 지난 주일는 부활절이었다. 부활절을 앞두고 교계에서는 다양한 행사를 벌였으며 그중 하나가 성 금요일(Good Friday)의 음악회라고 할 수 있다.

 성 금요일은 예수님이 골고다(갈보리)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날 몇몇 그리스도교 교회들은 예수의 수난과정을 묘사하는 수난곡을 연주한다. 바흐의 마태수난곡과 요한수난곡이 대표적인 곡들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수난곡은 중세시대에 각자 역할을 나누어 (예수역, 대사제역, 빌라도역, 베드로역, 유다역 등) 복음을 단선율의 그레고리오 성가로 부르던 히스토리아(historia)라는 형태에서 출발했다. 그것이 바로크시대의 바흐에 와서 최고조를 이루었는데 비록 작은 규모의 성가대와 오케스트라였지만 200여년후의 스테레오 시대를 염두한 듯한 더블콰이어, 더블오케스트라의 웅장한 형식에 복음사가의 레시타티브는 물론이고 솔로이스트들의 유려한 다카포아리아나 합창단의 절절한 코랄과 극적 상황의 합창모사, 예수의 후광효과, 음형상의 심볼리즘 등 음악기법상에 있어 여러번 무릎을 치게 만드는 대작중의 대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음악적인 외형보다 작품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라 할 수 있다. 마태수난곡은 기본적으로 마태복음 26, 27장의 수난부분과 피칸더의 종교시로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2000년전 유대인들이 한 인물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게 되는 모든 과정을 3인칭관점에서 목격하고 감상(感傷)에 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과연 이렇듯 매년 반복되는 수난의 사건과 이후에 일어나는 부활사건이 과연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종교적으로 혹은 음악적으로 현재의 우리와 필요 이상으로 괴리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미 이천년전에 그것도 중동지방에서 일어난 일이고 또한 종교적인 신비의 기적이며 더우기 이를 라이프지히의 소박한 작곡가가 음악으로 그려내고 있으니 우리의 현실과는 별다른 연관성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그 수난의 사건을 되집어보자. 당시 예수가 죽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십자가상의 죄목인 INRI(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즉 한낱 나자렛이란 조그만 촌동네의 젊은이가 유대인의 왕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문제였는데, 그렇지 아니하고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기 때문에 당시 유대교의 대사제인 가야파 등 지도자들이 일종의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명분상 로마제국에 쿠데타(coup d'etat)를 일으킬지도 모르는 위험한 인물로 몰아 당시 총독이었던 본시오의 빌라도에게 데려간다.

 하지만 빌라도는 예수가 그렇게 위험한 인물이라 판단하지 않았으며 더우기 간밤 꿈자리가 사나왔던 자신의 부인이 이번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바람에 더더욱 손을 털고 싶어 그냥 유대 지도자들의 손에 맡겼던 것이다 (실제로 빌라도의 부인은 당시 무녀였기때문에 만약 그가 이일에 관여했을 경우 후대에 받게 될 원성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빌라도가 피의 값을 부인했음에도 현재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신경 등에는 빌라도의 이름이 원망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이 사건은 과연 오래전에 우리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신비로운 사건에 불과한 것인가? 그리고 오늘에는 전혀 일어날 수 없을 만큼 우리들은 새로운 계약 (신약)에 익숙하고 성숙한사람들인가?

 몇년전에 들은 김용옥교수의 고전강의가 생각난다. 그는 TV에서 고전을 강의하여 많은 대중들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어느 순간엔가 급작스럽게 도중하차하게 되
었다. 이에 대해 사회학자 강준만의 의견에 의하면 기존의 (문화)권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도전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없이 어렵고 난해 해야만 역으로 존경을 받게 되는데 그것에 육두문자를 써가며 대항하고 너무 쉽게 대중속으로 파고드니 위기의식을 느낄만도 했을 것이다. 또한 컬럼니스트 이규태의 말처럼 농경문화에서 요구하는 균질한 인간형에 대해 그가 너무 껑충했기도 하다. 아니면 보다 근본적으로 갑골문학자인 김경일의 말처럼 우리사회에 팽배한 유교적 절대권력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에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한인들의 사회는 서양적인 합리주의의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또한 가야만 하게끔 유도되고 있다. 그런데 이왕 그래야만 한다면 진짜 합리주의를 찾아야 한다. 진정한 합리주의에서 필요한 덕목은 무엇보다도 쌍방향의 커뮤니케이션과 가시적인 피드백이다. 립서비스만 존재하고 실제에서는 아직도 연령에 기준한 상하관계만이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면, 이전에 어느 일본인이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지적했듯이 유교의 내용인 인간존중은 사라지고 그 앙상한 형식의 뼈대만 남아 결국 골다공증으로 부러져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김용옥이 자신에 대한 비판과 논쟁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모순을 보이는 것은 또다른 문제이지만, 적어도 오늘날 한국이라는 공간속에서 그 수많은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기념하고있는 예수라는 인물이 현재에도 얼마든지 다른 인물로 대치되어 시기, 질투, 밥그릇위협에 의해 ‘죽이기’를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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