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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깜박증인가 무성의인가

이종호/논설위원

20~30대 젊은이들이 알까? 늘 입에 달고 살던 단어도, 매일 같이 보는 사람 이름도 어느 순간 갑자기 떠오르지 않아 입에만 뱅뱅 돌 때의 난감한 경험을. 어머니 아버지들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 왜 꼭 집어 말하지 못하고 '거기' '그때' '그 사람' 혹은 '그것 있잖아 그것' 하면서 자꾸만 대명사로 얘기하는 지를.

노화는 서럽다. 소설가 박완서 같은 이는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어 좋다"며 편한 노년을 예찬했다지만 그것은 달관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 당장 신체적으로만 봐도 나이 든다는 것이 좋은 일은 별로 없다. 머리도 빠지고 이도 빠지고 다리 힘도 빠지고 기운도 빠지고 모든 것이 다 빠져 나간다.

두뇌인들 예외일까. 우리 뇌 세포는 30세만 넘기면 하루에 5만~10만여 개씩의 신경세포가 소멸된다고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기억력이 떨어지고 깜빡깜빡 건망증이 생기는 것도 그래서이리라. 그렇지만 어떡하랴. 세월 앞에 장사 없듯 건망증 또한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손님인 것을. 그러니 자주 깜박 깜박 한다고 지레 걱정할 일도 아니고 남이 그런다고 너무 허물 삼지도 말 일이다.

최근 신문 한켠에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의 글렌데일 평화의 소녀상 방문 해프닝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손 고문이 현장에서 인사를 하면서 소녀상이 있는 도시 이름을 몰라 머뭇거렸다는 이야기다. 젊은 기자는 그걸 두고 '한국에서였다면 그랬을까'라며 당혹스럽고 부끄러웠다고 썼다.



당연히 손 고문이 잘못했다. 노회한 정치인이 그런 실수를 하다니. 그렇지만 '인간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손학규 고문의 나이 올해 67세, 아무리 똑똑하고 영민한 사람이라도 어쩔 수 없이 깜박할 수 있는 나이다. 그가 누구인가. 박사에 교수에 도지사를 거쳐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되던 정치인이다. 용의주도하고 주도면밀했을 거라는 말이다. 그런 그가 지역 이름 하나 안 챙기고 왔을 리는 없을 터. 그러니 순간적인 깜박 증세였다고 해석할 수 밖에는.

본인만은 알 것이다. 그런데 만약 깜박증이 아니라 정말로 도시 이름조차 공부 않고 왔었다면 얘기는 심각해진다. 조금 비약해서 말하자면 이 작은 해프닝이 어쩌면 "이제 그만 정치에서 손을 떼시지요"라는 신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이 든 정치인을 그래도 존중하는 까닭은 오랜 세월 헤쳐 온 경륜과 식견을 높이 사서일 것이다. 일평생 꺾지 않은 꿈과 신념에서 보통 사람과는 다른 모습을 발견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거창한 구호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작은 행동 하나, 사소한 말 한 마디에서 확인한다. 하찮은 실수 하나, 별 것 아닌 행동 하나로 공인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그러니 손 고문의 이번 경우도 무성의와게으름의 합작품이었다면 더 이야기해서 무엇하랴.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은 많은 경우 그 자체로 면죄부가 된다. 그렇다고 그것이 벼슬은 아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말과 처신에 부담을 가지라는 것이 세상의 바람이요 기대다. 그것이 또한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노년의 자세요 지혜다.

건망증은 분명 반갑잖은 손님이다. 하지만 그것도 살아 온 긴 세월 다 기억하면 머리가 터질 터이니 좋은 추억만 간직하며 살라는 신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머리 굳어지는 것에는 최선을 다해 저항 해야 한다. 나이 든다고 잊어야 할 것은 안 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어버리는 고약한 일은 없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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