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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업] 눈물젖은 1세들의 삶

수잔 정/소아정신과 전문의

법대 공부를 하던 둘째 딸 카니가 어느 날 두툼한 책을 보내왔다. 조지타운 법대를 방문한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이창래씨의 처녀작 '영원한 '이방인(Native Speaker)'라는 책이었다.

소설 속에는 뉴욕에서 청과물 사업을 하는 한인 이민자들의 땀과 눈물섞인 이야기들이 담겨있었다. 세 살 때 부모와 함께 뉴욕으로 이민왔던 저자 자신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폭동 때문에 힘없이 희생되는 뉴욕 이민자들의 이야기는 훗날 LA에서 내가 두 눈 뜨고 쳐다보면서도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었던 LA폭동과 다를 바 없었다.

이 책으로 미국내 유수의 문학상을 6개나 받은 저자는 계속 주옥같은 작품들을 내어 놓았다. 그래서 '항복자(The Surrendered)'라는 책은 나오자마자 구해 읽으며 많이도 울었다. 나의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어린 시절에 얘기해 주셨던 우리 가족들이 겪은 6.25 전쟁과 1.4후퇴 때의 고생들이 눈앞에 선연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음은 정말로 내가 겪은 일이었는지 아니면 할머니의 이야기를 꿈에서 보았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눈 쌓인 언덕을 기어오르는데 저 밑에서 인민군들이 총을 쏘아대던 소리는 귀에 선하다. "엄마 이제 자고 가면 안돼?" 라고 어린 내가 말하면 어머니는 '애가 힘드나보다'고 여겨 농가를 찾아 들었단다. 그리고는 제일 먼저 버선을 벗겨 말리셨단다. 그래야 다음날 신고 또 걸을 수 있을테니.



'항복자'의 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직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여행이란 11살짜리 주인공 소녀가 청주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의 지붕 위에 간신히 올라타서 가는 피란길이었다. 6명 가족 중 부모와 언니가 자신의 눈 앞에서 무참히 사살 된 후 남은 일곱 살짜리 쌍둥이 동생들이 기차 지붕에서 떨어질까봐 광목천으로 움켜싸안고 가는 죽음 직전의 여정이었다. 비록 지붕 위라도 운좋게 기차를 얻어 타기 전에는 그녀와 동생들은 타박타박 끝도 없는 길을 걸어야 했다. 비라도 쏟아지면 농가에 뛰어 들어 다른 30여 명의 피란민들과 함께 작은 방 하나에서 앉은 채로 자야했다. 또 동생들의 머리카락 사이로 하얗게 움직이는 '이(lice)'를 그녀는 참빗으로 훑어내주곤 했다.

이 책의 농가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어느 논둑길이 떠올랐다. 다섯 살 무렵 논둑에 서서 손에 들고 있는 바가지는 기억하는데 그 속에 동네분들이 준 된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길고 긴 논둑과 앞으로 얼마나 가야될지 모를 여행의 두려움은 지금도 손에 잡힐 듯하다.

공영방송 NPR에서 최근 이창래씨의 5번 째 책이 나왔다며 그의 문체를 극구 칭찬했다. 내 어깨가 으쓱했다. 어디선가 읽은 유망한 노벨상 후보라는 말도 흐뭇했다.

어느 친구가 자녀들에게 한국에서의 배고팠던 얘기를 하자 "엄마, 왜 냉장고에 가서 꺼내먹지 그랬어?" 라고 물었다던 일화가 생각난다. 꿈에서조차 다시 대하기 싫은 우리 1세들의 이야기를 2세, 3세들에게 읽히자. 한 민족의 한과 정을 그대로 그려놓은 '제스처 인생(A Gesture Life)'도 그들과 함께 읽어보자. 그 고통의 시간을 이겨 나온 우리 1세들의 눈물 젖은 승리의 삶을 그들과 함께 이야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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