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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투신자살

[LA중앙일보] 발행 2003/08/08 미주판 18면 기사입력 2003/08/07 15:41

이기준 시카고 중앙일보 논설위원

1961년 개봉된 ‘초원의 빛(Splendor in the Grass)’ 만큼 사춘기 남녀의 사랑을 그토록 애절하게 담아낸 영화도 드물 것이다. 끝내 맺어지지 못하는 부잣집 아들 버드(워렌 베이티)와 윌마(나탈리 우드)의 그 안타까운 사랑은 지금도 올드 팬들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돼 있다.

‘여기 적힌 먹빛이 희미해질수록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 희미해진다면∼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는 그것이 돌려지지 않는다 해도 서러워 말지어다∼’ 하는 워즈위드의 수채화 같은 시는 세계인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너무나도 기가막힌 주인공들의 사랑 만큼이나 막상 버드 부친의 기구한 죽음은 버려져 있다. 사업에 실패한 그가 마지막으로 가족(아들)을 만나고 난 후 숙소 건물 창문을 통해 투신한 것이다. 창문에 다가선 그의 고뇌가 관객의 눈시울을 붉게 한다. 죽음 직전에도 오로지 혈육에 대한 진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

‘임직원 여러분은 일치단결해 이 난관을 극복, 빛나는 범양이 되기 바랍니다.’

지난 1987년 4월19일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이 10층에서 투신자살하기 전 남긴 유서중 일부다. 박회장은 노태우 정권 당시 1백억원의 비자금 조성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던중 이같은 비극적 최후를 택했다. 비자금 문제로 국내에서 기업인이 투신자살한 최초의 사례였다. 그 역시 투신 전 가족들에게 이런 내색은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자살은 오늘 날 인간의 10대 사망원인중 하나다. WHO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는 하루 1천여명씩, 연간 50만여명이 자살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OECD소속 25국에서 한국인의 자살률은 10위의 부끄러운 선진국( )이다. 지난 91년 6천5백93명에서 IMF직후인 98년 1만2천4백여명으로 거의 2배나 급증했다. 그 뒤 꾸준히 증가, 2002년 1만3천여명으로 늘었다.

자살의 원인은 정상적인 삶의 붕괴로부터 온다. 구체적으로는 경제·생활고 등에 따른 비관과 병고가 70% 이상이라고 한다. 자살 방법도 여러 가지로 WHO는 무려 1백여종이나 분석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투신이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과거 강이나 바다에서 투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아파트 등 고층건물 문화가 도래하면서 고층투신이 부쩍 늘었다.

기독교에서 자살은 가장 큰 죄중 하나로 여긴다. 소크라테스도 ‘사람은 신이 부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서는 안된다’ 고 설파했다. 그러나 오죽하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야 했을까. ‘죽음에 대한 공포는 죽음보더 더 무섭다’ 는 영국 학자 버튼의 말처럼 죽음 앞에 초연해질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지난 4일 현대 아산그룹 정몽헌 회장이 12층에서 투신자살해 모든 사람을 숙연케 하고 있다. 그 역시 대북송금과 관련된 1백50억원 비자금 문제로 검찰의 조사를 받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다.

“○○엄마, 모든 게 내 잘못입니다. ○○, ○○, ○○, 이 아빠를 용서하기 바랍니다. 엄마 모시고 행복하게 잘 살아라.” 가족에게 남긴 유서중 일부가 주변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원인을 두고 일부 정치권이 정략적으로 이용하려고 해 미주 한인사회에서도 분노를 사고 있다. 여당 일부 의원들이 냉전수구 세력들의 특검 압박 때문에 이런 비극이 초래됐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현대가 정상적인 대북사업을 하도록 놔두었으면 그만인 것을 무리한 대북관계로 끌어들여 존폐의 기로에 서게 만든 장본인이 누구인가.

뒷돈 5억달러라든지 비자금 1백50억원을 비롯한 밝혀지지 않은 지출 때문에 기업 자체가 현재 거덜나 있는 상태다. 이 때문에 정회장은 부족한 자금 확보 문제로 연중 3분의 1은 외자유치라도 해보기 위해 외국에 나가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현대가 DJ정권의 이렇게 무리한 요구에 응하지만 않았던들 이런 비극은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 정회장의 죽음은 노망한 정치권의 야욕이 부른 참화로 밖에 볼 수 없다. 아직도 그의 죽음을 야당과 특검 탓으로 돌리는 그들의 심보가 한심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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