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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업] 나는 행복한 정신과 의사

수잔 정/소아정신과 전문의

의대 졸업 후 나는 2년간 내과 수련을 받았다. 그리고 27세 되는 해 미국으로 와 내과를 계속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민온 지 2년만에 월남전이 끝나면서 전장에서 돌아온 미국내 의학도들에 의해 내과 레지던트 자리는 채워졌다. 반면에 정신과 레지던트 자리는 많았다. 1965년 케네디 대통령이 서명한 '지역사회 정신건강법'에 의해 정신과 병원 등에 입원해 있던 많은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들이 외래로 치료 받으면서 지역사회 안에서 살 수 있도록 돕는 '정신건강 보건소'가 도시 곳곳에 세워졌고, 그곳에서 일할 정신과 의사가 필요했다. 이런 환자들이 가정으로 돌아 올 수 있도록 도와 준 일등공신은 1950년대 프랑스 외과의사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클로르프로마진(상품명은 토라진)이라는 항정신제 약물이었다.

당시 미국의 젊은 정신과 의사 프랭크 에이드가 처음으로 이 약을 정신과 환자들에게 투여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환청이나 피해망상증상들이 말끔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뿐만 아니다. 대화도중에 남이 말을 끝내면 그 말을 앵무새같이 되풀이하거나, 아예 완전히 대화를 차단해버리는 '캐터토닉(catatonic)' 상태의 환자들도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이들 환자들은 식사와 수면을 정상으로 할 수 있으니 병원에 입원해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당시 이같은 만성 정신질환 환자들이 입원해 있던 병상의 수가 미국 병원 전체의 40%를 차지하고 있었다니, 국가가 정신건강 보건소를 지어서 외래로 통근치료를 받게 할만도 했다.



미국에 온 첫 해, 뉴욕에서 급한 김에 정해던 나의 정신과 수련의 생활은 결국 4년간 계속됐다. 내가 내과 수련의 자리를 찾을 생각을 접었던 큰 이유는 가족이 서로 떨어져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정신과 수련의 자리는 수요가 많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남편이 마취과 수련을 위해 뉴올리언스로 가기로 결정한 지 2주일만에 툴레인 의대의 정신과에서 오라는 연락이 왔다. 뉴올리언스에서 수련을 마친 후 우리 부부는 미육군 군의관 자격으로 용산 121 후송병원에 배속됐다. 그곳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미국의 젊은 병사들이 말이 다르고 풍속이 낯선 한국 땅에 떨어져 불안과 우울증세, 약물중독 등에 빠지는지 알게 됐다. 상관인 지휘관들의 손에 이끌려, 이들은 풀이 죽거나, 분노에 날뛰거나 또는 고향생각에 눈물지으며, 5살 아이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정신감정을 통해 이들을 다른 지방 주둔지나 본국으로의 이송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정신과 의사는 만성적인 정신분열증 환자를 치료한다는 이전의 선입관과는 달리 타인의 인생을 한순간에 변화시키는 직업이다. 대부분의 정신병은 초기에 발견해 다각적인 치료를 하면(정신적, 신체적, 환경적, 영적) 효과가 눈앞에 보인다. 내과 레지던트 시절에 보던 만성결핵, 각종 말기 암, 심한 중풍, 신체마비 등이 모든 내과 질환을 대표하지 않듯이 정신분열증이나 조울증 환자는 정신병 중 오직 일부일 뿐이다.

이민 초기에 마지못해 선택했던 정신과 의사, 그러나 40년이 지나고나서 나는 정신과 의사임이 기쁘고 자랑스럽다. 인생이라는 전투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 바로 나의 직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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