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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자서전을 씁시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학 교수

작년 가을 어느날 저녁, 누군가 초인종을 눌러 문을 여니 백발 성성한 노인이 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노인은 내 눈앞에 책을 한 권 꺼내들었다. 현재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캐나다 토론토 교외의 작은 던다스 마을에서 70년 넘게 살아온 노인은 은퇴 후에 자서전을 집필한 것이다.

뜻밖의 책 판매에 머쓱해하는 내게 노인은 그 책의 효용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으면 적어도 세 가지를 얻을 거요. 30년 전만 해도 이 집터는 풀숲이었고, 저 큰 길도 비포장 자갈길이었죠. 나와 내 친구들이 직접 길 닦고, 다리 놓고, 전기 끌어오고, 수도관 깔고, 건물 짓고, 학교 세우고, 마을 축제를 시작했죠.



그 얘기가 소상히 적혀 있으니 이 책을 잘 읽으면 이 동네 살면서 뭐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다 알게 될 거요. 특히 최근에 이사를 온 사람들이나 이민자들이라면 토박이들만 알고 있는 얘기를 듣게 되는 거지요.

둘째로 이 책에는 내가 직접 겪었던 일들이 빠짐없이 적혀 있다오. 유년기, 학창시절, 첫사랑 추억, 연애 경험, 결혼 생활까지. 무엇보다 젊은 날에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저질렀던 이런저런 실수들까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죄다 적어놨지요. 이 책을 읽으면 그런 실수를 피해갈 수 있으니 작은 인생의 슬기를 얻게 될 거요.

또 이 책에는 지금은 잊혔지만, 50~60년 전에는 누구나 잘 알던 아주 재미난 농담들이 수북이 들어가 있죠.

요즘 젊은이들도 우스운 얘기를 많이들 하지만, 농담의 전성기는 누가 뭐래도 1950년대였다오. 이따금 그 얘기들을 풀어놓으면 손자들이 배꼽을 잡고 떼굴떼굴 구른다니까.

자서전에 관한 설명이 모두 끝난 다음, 노인은 고언을 내뱉듯 눈가에 민망함을 담고서 자서전의 가격을 알려주었다. 결코 싸지 않은 가격이었다. 마음 속으로 몇 번이나 책을 집었다 놨다.

당장 펼쳐들고 읽고 싶었지만, 나는 어리석게도 그 책을 사지 않았다. 결국 정중히 사절하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 하고 쓸쓸히 돌아섰다. 책을 팔지 못한 아쉬움이라기보단, 평생에 걸쳐 스스로 힘겹게 깨달은 소중한 지혜를 외면하는 젊은 세대에 대한 섭섭함이었으리라.

몇 달이 지나 나는 그 노인의 자서전을 찾기 시작했다. 이웃에 수소문도 하고 인터넷도 뒤졌지만 그 책을 찾을 수는 없었다.

대신 마을 도서관에서 그동안 던다스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직접 써서 출간했던 수십 권의 전기와 자서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혀 모르고 살았었는데, 마을의 길 이름 하나하나도 그 고장에서 살다 간 공직자, 의사, 교육자, 작가, 시인의 이름을 따서 붙였음을 확인했다.

과연 역사는 무엇일까. 거대담론은 필요 없으리라. 실개울 같은 개개인의 간절한 체험이 모여서 기록의 강물이 되고, 그 강물이 흘러가면 역사의 바다가 된다. 산더미의 문헌을 들추고 나면 결국 공들여 기록을 남긴 한 영혼을 만나게 된다. 삶은 기억을 남기고, 기억은 기록을 요구한다.

모든 사람의 생명이 신성하듯, 개개인의 체험은 소중한 지혜의 보고다. 우파니샤드의 가르침대로 인생의 만년은 영혼의 해방을 위한 정진의 시간일 것이다. 지혜로운 어르신들이여, 부디 자서전을 써서 남겨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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