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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일제 잔재 '고려장' 이라는 말

[LA중앙일보] 발행 2014/05/05 미주판 23면 기사입력 2014/05/04 17:21

엄을순·문화미래이프 대표

내 뇌는 구닥다리 386컴퓨터다. 한번 입력해놓은 정보는 좀처럼 바꾸기 힘들다. 다시다, 맛나니, 감치미. 세월 가며 이름이 수십 번 바뀌어도 조미료는 내게 미원이다. 일제 잔재라며 금지된 '국민학교'란 말도 내 입에선 잘도 튀어나온다. 쓰지 말라는 닥꽝이나 오뎅도, 단무지나 어묵보다 의미전달이 확실하고, 자장면보다는 '짜장면' 해야 면발이 더 쫄깃해 보이고, 효과를 '효꽈'로 읽어야 뜻이 확실히 전해진다.

사용하지 않기를 권장한 위 단어들은, 안 쓰면 좋고 쓰더라도 큰 문제 없어 보이지만, 폐기되어야 할 끔찍한 단어가 하나 있다. '고려장'. 인터넷마다 비슷하게 적혀 있지만, 네이버 지식백과를 인용하자면 "늙은 부모를 산속 구덩이에 버려두고 죽은 뒤 장례 지냈다는 풍습으로 오늘날에도 늙고 쇠약한 부모를 낯선 곳에 유기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기도…고려라는 명칭 때문에 고려 시대에 있었던 장례 풍습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이러한 풍습이 있었다는 역사적 자료나 고고학적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고려장이 노부모를 산에 버리는 장례 풍습을 뜻하는 말로 처음 사용된 것은, 미국의 작가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가 일본에 머물면서 쓴, '한국 고대 사회에서 노인을 산 채로 묻어버리는 고려장이 성행…'이라는 글 때문인데…한 번도 한국에 와보지도 않고, 일본의 자료들만 가지고 왜곡하여 서술한, 친일 작가의 글 때문에 설화가 역사적 사실로 둔갑되고 굳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이리저리 잘 따져보면 고려장이란 말은, 확실한 일제 잔재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문에서, TV에서, 대화에서, 아직도 쓰고 있다. 얼마 전 TV에서 '신 고려장, 버스터미널에 버려진 노부부'란 타이틀의 프로를 봤다. 늙은 부모를 터미널에 유기한 몹쓸 자식들 얘기다. 시골에서 양계장을 운영하며 잘살던 노부부는 큰아들과 함께 살기 위해 집과 땅을 팔고 큰며느리랑 서울로 오게 되었으나,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큰며느리에 의해 유기된다. 이 사실을 알고서도 외면하는 큰아들, 작은아들, 며느리들.

보는 내내 화가 치밀었지만 나를 가장 화나게 한 건 타이틀이다. '신 고려장'이라. 고려장을 인정한다는 거다. '효를 가장 중요한 덕으로 여기던 고려 시대에, 늙은 부모를 산에 버리는 장례 풍습이 과연 존재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마다, '그랬으니까 그 말이 생겼겠지' 하며 우리가 너무 쉽게 수긍해버린 건 아닐까. 일본인이 펴낸 『전설의 조선』 『조선 동화집』 등에 이런 설화가 수록되고 『고려장』이란 영화가 나온 다음부터 이 설화가 역사적 사실인 양 확산된 것이라 하던데.

이제 더 이상, 고려장이란 말을 쓰지 말자. 부모를 인천공항에 버린 자식도 있고 터미널에 버린 자식도 있고, 부모 살인한 살인자도 있다. 그들은 그저 몹쓸 자식들인 거다. 그런 자식들 외국에는 훨씬 더 많다.

죄를 판단할 때 확실한 증거 없으면 무죄라던데, 하물며 증거도 없는 고려장을 사실로 여길 수는 없다. 우리 조상의 기를 끊으려 산꼭대기 곳곳에 박아놓은 굵은 쇠파이프나 고려장이나, 모두 다 일제 잔재다. 일제칙령에 따라 황국신민(皇國臣民)의 국 자와 민 자에서 비롯된 '국민학교'란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꿨듯이 고려장도 다른 명칭이 필요한 건 아닐까.

그 말을 들었을 때 고려라는 나라가 떠오르고, 또 늙은 부모를 산에 갖다 버리는 장면이 떠오른다면, 그 말은 더 이상 사용하면 안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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