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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삶은 달걀은 왜 맛있을까

[LA중앙일보] 발행 2014/05/07 미주판 22면 기사입력 2014/05/06 20:59

이종호/논설위원

60~70년대, 한국은 발전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가난이 일상인 시절이었다. 많은 어머니들은 고단하게 일을 해야 했고 그런 어머니를 기다리며 아이들은 자랐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 시장에 간 우리 엄마 /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 엄마 안 오시네, /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 아주 먼 옛날 / 지금도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 그 시절, 내 유년(幼年)의 윗목.

기형도 시인의 시 '엄마생각'이다. 오래 전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울었다. 열무 삼십단만 빼면 모두가 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일 나간 엄마를 혼자서 기다려 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리라. 그 간절함과 두려움의 시간이 얼마나 더디게 가는가를.

어머니는 마흔이 넘어 나를 낳으셨다. 늦게 본 막내였는데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머니는 늘 내가 장성하기 전에 당신이 어떻게 될까봐 걱정하셨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800리를 덮는다"며 "헌 거적때기 같은 에미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도 하셨다. 그 때는 그 말뜻을 알지 못했다.

중학교 때였다. 내 도시락은 빈궁했다. 방출미로 지은 밥은 푸르르 날렸고 반찬은 허여멀건 김치 아니면 콩장이었다. 계란말이나 소시지 반찬을 싸오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한 번은 어머니께 나도 달걀 반찬 좀 싸주면 안 되겠느냐고 말했다. 뻔히 사정을 아는 터라 기대는 안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시락을 연 나는 깜짝 놀랐다. 밥 속에 삶은 달걀이 하나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달걀 하나일지언정 마음껏 먹을 수 있던 형편이 아니었다. 많은 식구에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고 할 수도 없었던 귀한 달걀. 어머니는 막내를 위해 몰래 도시락 깊이 묻어준 것이다.

어머니는 옛날 사람이었다. 달걀이라면 그저 종지에 풀어 밥 위에 찌는 것 아니면 물 붓고 삶는 것이 할 줄 아는 요리의 전부였다. 도시락 반찬으로 삶은 달걀을 통째로 싸오는 친구는 없었다. 민망했다. 그날 난 그 달걀을 학교에서 먹지 않았다. 바.보.같.이….

그 때 이후 어머니는 가끔 그렇게 삶은 달걀을 도시락 밥 속에 넣어주셨다. 어쩌면 그 달걀 힘으로 고등학교 입시전쟁을 이겨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습관은 무섭다. 지금도 달걀하면 나는 삶은 달걀을 최고로 친다.

어머니는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분이셨지만 독학으로 한글을 깨쳤다. 내가 대학 공부하러 서울로 올라가자 어머니는 수시로 편지를 보내셨다. 찢겨진 공책 쪼가리에 삐뚤빼뚤 써 내려간 어머니 편지는 늘 '오매불망 보고 싶은 우리 아들 보거라'로 시작했다. 가난과 결핍을 미안해 하는 마음을 4.4조 가사체에 담아 적고는 항상 이렇게 끝을 맺었다. '에미 걱정일랑 말고 우짜든동 몸조심 하거라. 이만 총총.' 표기법도 맞춤법도 전혀 맞지 않았지만 세상 어떤 편지보다 귀하고 소중한 편지였다. 지금은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어머니는 당신의 염려와는 달리 내가 대학 가고, 직장 잡고, 결혼하고 7년 만에 낳은 손자까지 보고 나서 돌아가셨다. 14년 전이다. 어머니를 여의고 난 뒤 나는 비로소 '수양산 그늘'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것은 잘났든 못났든 세상 모든 어머니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 자식들에게 힘이 된다는 것이다. 이 땅의 부모는 단 한 명 예외 없이 모두가 위대하다는 것이다.

5월, 다시 어머니 날이 온다.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어도 더 이상 그럴 수가 없다. 못난 자식은 괜히 삶은 달걀만 또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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