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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거라지 세일과 '아나바다' 정신

[LA중앙일보] 발행 2003/11/01 미주판 21면 기사입력 2003/10/31 18:21

이종호 뉴욕중앙일보 편집부장

경제학자 케인스는 ‘소비가 미덕’이라고 했다. 저축이 최고라고 여겼던 예전의 한국인들로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다. 그러나 제대로 소비가 안되면 가게와 공장이 문을 닫고 경제도 침체에 빠진다는 말이니 막무가내로 무시할 것도 아니다.

미국서 지내다 보니 미국인들은 이 말을 금과옥조로 떠받들며 살고 있다는 걸 자주 느낀다.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이나 물·종이·철·육류 등의 소비량이 모두 세계 제일이라는 통계처럼 백화점이나 할인매장·동네 그러서리 마켓에만 가도 미국인들의 왕성한 소비생활을 실감할 수 있다.

그들에게 절약이란 개념은 없어 보인다. 쇼핑 수레가 넘치도록 가득 가득 물건을 사 가는 미국인들을 보면서 과연 저 많은 것들을 다 먹고 입고 쓸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렇지만 미국은 소비에 있어서도 두 얼굴을 가졌다. 쇼핑을 취미 삼아 즐기는 미국인들이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알뜰하기 이를 데 없는 게 또한 그들이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의 검소한 소비생활을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예가 ‘거라지 세일’(garage sale)이다.

소비가 미덕인 나라

거라지 세일이란 쓰지 않고 차고나 창고에 쌓아 두었던 물건을 펼쳐 놓고 파는 일종의 중고품 직거래장이다. 앞 뜰에서 한다 하여 야드 세일(yard sale)이라고도 하고 가격표를 붙여 놓고 한다 하여 태그(tag sale)이라고도 한다. 이사 가는 집이 가구에서부터 모든 물건들을 다 처분하는 좀 더 규모가 큰 것은 무빙 세일(moving sale)이라 하는 데 이런 곳은 건질 게 많아 특히 인기가 있다.

처음 미국에 온 뒤 즐거움 중의 하나는 주말마다 이런 세일 구경 다니는 것이었다. 전봇대나 가로수에 나 붙은 안내 전단을 보고 찾아 다니다 보면 괜찮은 물건을 아주 싼 값에 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물건을 싸게 산다는 실리적 이유 말고도 미국인들의 집을 구경하고 그들의 사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것도 재미다.

거라지 세일을 다니다 보면 단돈 몇 십 센트일지언정 저런 걸 팔겠다고 내 놓았을까 싶은 물건도 많다. 헌 옷이나 낡은 신발은 물론 찌그러진 그릇, 고장난 시계, 때 찌든 유리병에 쓰다 남은 포장지까지 나와 있다. 그렇게 내놓기가 민망할 정도로 하찮은 물건이지만 버리지 않고 재활용의 기회를 주는 게 미국인이다. 또 그런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며 사다 쓰는 사람들, 그게 또 미국인이다.

그런가 하면 어쩌면 저렇게 깨끗하게 썼을까 싶을 정도로 멀쩡한 물건도 많다. 특히 애들 책이나 장난감이 그렇다. 새 물건도 얼마가지 않아 너덜너덜하게 되는 우리 집 경우를 생각하면 작은 물건 하나라도 소중하게 쓰고 다시 내 놓는다는 것이 참 대단하다 싶었다.

거라지세일은 가족이벤트

거라지 세일이 꼭 돈을 위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부러웠다. 나는 필요없게 됐지만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다시 나눠 준다는 재미에, 즐거운 마음으로 벌이는 가족 특별 이벤트라는 느낌을 자주 받았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앉아서 몇 달러, 몇 십 센트씩 받고 팔아 봤자 정말이지 일당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서민들 뿐만 아니라 부자 동네 사람들도 즐겁게 물건을 팔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진다.

아이들에게 비즈니스 마인드를 심어 주기 위해서 거라지 세일을 한다는 말도 들었다. 아이가 쓰던 물건은 자기가 직접 정리해 팔아 보게 하는 것이다.

미국 아이들은 이렇게 자란다. 그러면서 내 물건일망정 깨끗하게 써야 제 값 받고 남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것도 함께 터득한다.

미국인들이 흥청망청 소비 생활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알뜰함과 검소함이 몸에 배어 있는 것은 이런 경제관념이 어릴 때부터 뒷받침되어서 일 것이다.

흔히 일본을 일러 나라는 부자인데 국민은 가난하다고 한다. 한국은 거꾸로 나라는 가난한데 국민들만 부자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은 나라도 부자이면서 국민도 부자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쓴다는 ‘아나바다 정신’이다.

거라지 세일은 이런 ‘아나바다’를 배우는 살아 있는 학습장이다.

〈nyljho@joongangu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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