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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백을 얻은들, 천을 가진들

[LA중앙일보] 발행 2014/05/20 미주판 20면 기사입력 2014/05/19 20:33

이종호/논설위원

#. 나는 농사를 모른다. 그래도 시골 언저리에서 자란 탓에 때맞춰 씨 뿌리고 김매고 가을걷이 하는 과정은 꽤나 보고 들었다. 그 때 동네 어른들이 늘 하시던 말씀이 "농사는 때가 있어. 너무 서둘러도 안 되고 게을러서도 안 되지"라는 것이었다. "농사는 음력이야"라며 24절기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24절기란 입춘(立春)부터 대한(大寒)까지 보름 간격으로 이어지는 전통적 계절 구분 단위다. 그런데 음력은 아니다. 지구는 1년에 한 바퀴 태양을 돈다. 24절기는 이 궤도를 15° 간격으로 쪼개 각각 이름을 붙인 것이다. 철저히 태양력에 따라 정해졌다는 말이다.

24절기상으로 봄은 입춘부터 시작해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까지다. 음력 1~3월, 양력으론 2~4월 무렵이다. 여름은 입하부터 소만, 망종, 하지, 소서, 대서까지다. 양력 5~7월이다. 음력으로는 4, 5, 6월이고 '오뉴월 무더위'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입추부터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까지는 가을이며 양력 8~10월에 해당된다. 음력으로는 7~9월이다. 마지막으로 겨울은 입동부터 소설, 대설, 동지를 지나 소한, 대한까지다. 양력 11~1월이며 음력으론 10, 11, 12월이다. 음력 11월은 동짓달, 12월은 섣달이라 했는데 '동지섣달 기나긴 밤'이란 이때가 해가 가장 짧고 춥기도 가장 추워서 나온 시구다. (참고로 한식, 단오, 칠석은 24절기가 아니라 그냥 세시풍속 상의 명절이다).

그런데 24절기상의 계절은 한반도의 실제 계절과는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다. 고대 중국 주나라(周, BC 1046~BC 771) 때 자기네 땅 기후와 생태에 맞춰 만든 것이 24절기이기 때문이다. 3000년이란 세월 동안 지구 생태계는 또 얼마나 달라졌는가.

그래도 우리 조상들은 이 24절기를 잣대 삼아 농사도 짓고 생활도 꾸려왔다. 24절기에 맞춰 온갖 세시풍속도 생겨났고 그것이 민족의 DNA가 됐다. 지금 미국에 사는 한인들도 가끔은 "우수 경칩 다 지났는데 왜 이리 추운거야?" "왜 이리 덥지? 입추가 아직 멀었나?" 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 내일(5월 21일)은 24절기로 소만(小滿)이다. 입춘부터 8번째, 여름 문턱 입하 다음 절기다. 이때쯤이면 본격적인 모내기 준비를 했다는데, 햇볕은 점점 짙어지고 초목도 하루가 다르게 무성해지는 좋은 계절이다. 하지만 백성들에겐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가 이때였다. 작년 곡식은 이미 다 떨어졌고, 산야에 뜯어먹을 나물도 못 먹을 정도로 자라버렸고, 아직 햇보리 수확은 못했고…. 춘궁기 보릿고개의 절정이 이 무렵이었던 것이다.

작을 소(小) 채울 만(滿), '소만'이라는 이름은 이런 배경과 무관치 않다. 땟거리조차 없는 형편에, 무엇인가 조금만 더 채워졌으면 좋겠다는 민초들의 작은 소망이 이 이름 속에 담겨있다. 대서-소서, 대설-소설, 대한-소한처럼 다른 절기는 다 짝을 이루고 있는데 소만만 혼자인 이유도 마찬가지다. 크게 채우고 크게 만족하겠다는 '대만(大滿)'의 욕심은 아예 갖지도 않았던 소박한 염원이었던 것이다.

'세월호 민심'에 한국이 요동치고 있다. 가라앉은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화두로 온 나라가 뜨겁다. 그러나 결국 또 '정치'로 흘러가고 있다. 그것도 내 방식대로만을 고집하는 불통과 불관용의 사생결단 정치로.

사람 욕심엔 고삐가 없다. 열을 얻으면 백을 챙기려 한다. 천을 가진들 만족할 수 있을까. 그릇은 고만고만한데 그렇게 크고 많은 것을 한꺼번에 다 담으려드니 어쩌자는 말인가. 농사만 때가 있는 게 아니다. 소만의 절기, '작은 채움'의 깨달음이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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