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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In]'파이딍'과 '파이팅' 의 차이

정구현·사회부 차장

'대한민국 파이딍'

102세 오재인 박사가 한국선수들의 월드컵 선전을 기원하며 직접 쓴 글(사진)이다. 지난 19일 인터뷰를 마치고 한자한자 적어 기자에게 건냈다.

1912년에 태어난 그에겐 파이팅이 아니라 파이딍이 맞는 표현이다. 100세가 넘었지만 글자의 획은 여전히 힘차다.

오 박사는 대한민국 축구의 선구자이자 산 역사다. 소학교 시절부터 축구를 시작해 빼앗긴 나라에 대한 울분을 시원한 골로 날려버린 당대 최고의 축구선수중 하나다.



특히 1934년에는 전일본고등전문학교(대학) 축구대회에서 유일한 조선팀이었던 경성치과의전 선수로 참가해 역사를 썼다. 당시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규슈제국대학과 결승전에서 맞붙어 12-0으로 대승을 거뒀다. 또 당시 흥행 최고 경기였던 경평축구대회에 경성팀 대표선수로도 뛰었다.

오 박사와의 인터뷰는 쉽지 않았다. 고령이어서 문답을 주고 받기 어려웠고, 그의 기억도 반드시 맞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확인 작업차 고신문들을 뒤져야 했다. 품이 들어가는 일이었지만 그 덕분에 짐작조차 못했던 역사적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1930년대 '파이딍' 한반도엔 축구 광풍이 불고 있었다.

1933년 5월17일 관서체육회 주최 제 9회 전조선 축구대회가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하루종일 비가 내렸던 날이다. 한 일간지는 '우천임에도 불고하고 만을 넘는 관중이 조금도 긋침이 업엇다. 오전 아홉시부터 시작하야 오후 여섯시에 마쳣는대 …'

당시 우천 경기는 지금보다 몇 배나 어려웠다. 가죽 축구공은 방수가 되지 않아 물을 흠뻑 흡수했다. 무거운 공은 선수들이 차거나 헤딩하기에 고통의 대상이었다.

관중도 힘들었다. 맨땅이라 질척거렸고 관중 스탠드도 없어 꼼짝없이 내리는 비를 맞아야 했다. 열기는 지금의 영국 프리미어리그 라이벌전 만큼이나 높았던 셈이다.

당시 '서포터스'도 붉은 악마 못지 않았다. 1924년 열린 5회 전조선축구대회 기사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응원은 배재(고등학교)가 제일이다. 적기, 청기, 황기, 백기, 자기, 북, 징, 나발까지 옛날 삼국지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응원이 과열되면 지금처럼 팬들간에 충돌도 있었다.

1924년 5월 전간도 중학축구대회에서는 선수와 관중이 뒤엉켜 싸우는 바람에 무장경관까지 동원됐다. 신문은 논설에서 그 책임 소재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 투쟁자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책임을 입어야 할 것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당시 여성들의 축구 선수사랑이다.

1930년 전주에서 열린 축구대회에서다. '쉬는 날이라 관중이 밀려드러와 정오가 지낫슬 쯤에는 편안히 서서 구경할 자리 하나도 업섯스며 부인석도 만원이상의 만원이엇다. 스뽀츠 경기 어딜가든 기생들들이다. 경기보다 선수들이 관심이다. 소낙이가 퍼붓는데 비단옷과 신발은 엇절라고 그러는지.'

80여 년이 지났다. 열악하던 조선의 파이딍 축구는 세계적인 대한민국 파이팅 축구로 발전했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오 박사에게 축구는 변하지 않았다. "감독은 화합하고, 공격수는 연락(의사소통)하고, 수비수는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축구다. 관중의 의무도 여전하다. 그는 "승부는 내 소관이 아니다"고 했다.

진흙탕에서 뒹굴며 물 먹은 가죽공을 차고, 승부와 상관없이 비를 맞으며 외치던 그때의 응원 문구가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듯 싶다. 대한민국 파이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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