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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문창극과 '친일'의 덫

[LA중앙일보] 발행 2014/06/24 미주판 22면 기사입력 2014/06/23 23:01

이종호/논설위원

#. 오랜 논란 끝에 2009년 마침내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이 발간됐다. 거기엔 4389명의 반민족 친일 행위자의 이름이 올라 있다. 그 중엔 '시일야방성대곡'으로 민족의 울분을 토로했던 위암 장지연,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음악가 홍난파 등이 포함돼 있다. 또 들으면 알만한 유명 학자, 문인, 예술인, 사상가, 기업인, 언론인도 망라되어 있다. 압권은 장면 전 국무총리와 대통령 박정희다.

이것이 대한민국 현대사의 딜레마다. 민족의 아픈 역사는 기록돼야 하지만 그들을 모두 부정하거나 지우고 나면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백지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친일'은 이렇게 늘 곤혹스럽고 부담스러운 문제다. 더구나 일제 때 태어났거나 자라면서 일본을 직접 경험한 세대들이 지금도 다수 생존해 있고, 그 자손들이 여전히 한국 사회의 주역으로 뿌리내리고 있다. 지근 거리에 살면서 싫든 좋든 수십 년을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교류하고 있는 나라가 또한 일본이다. 그렇다면 친일(親日)의 경계는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당장 일본차를 타고, 일본 음식을 즐기고, 일본 사람과 교제하고, 일본으로 여행도 가는 우리의 태도는 또 무엇일까.

#. 많은 역사가들이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으로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지적한다. 지금 한국이 안고 있는 모든 반목과 갈등의 뿌리가 거기에 닿아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인지 '친일 청산'은 늦게라도 반드시 실현해야 할 민족의 대의(大義)처럼 되었다. 거기에 독도나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의 오만한 태도까지 더해져 반일 감정은 갈수록 높아만 간다. '친일=반민족=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는 국민 정서는 여기에 기인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프레임이 때론 나와 생각을 달리하는 특정인을 공격하는 도구로 악용된다는 데에 있다. 지난 2주간 한국 사회를 흔들었던 문창극 총리후보자 사태도 이런 틀 안에서 보면 좀 더 분명한 그림이 그려진다.

개인적으로 문 후보자의 과거 칼럼, 언행, 행적 등을 돌아볼 때 그가 정말로 반민족 친일파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논란의 빌미가 된 3년 전 교회 강연도 전체 맥락을 들어볼 때 전적으로 그렇게만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그는 덫에 걸려들었다.

한국 사회에선 누구든 '친일'이라는 덫에 한 번 걸려들면 여간해선 살아나오기 힘들다. 문 후보자 본인으로서는 억울하고 펄쩍 뛸 노릇이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중은 단편적이고 자극적인 정보에 더 강렬하게 반응한다. 앞뒤 전후 사정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것이 여론재판의 속성이다.

#. 편 가르기에 익숙한 우리는 내 편이면 선(善)이고 상대편이면 무조건 악(惡)이라는 등식에 물들어 있다. 정치권은 더 그렇다. 그래서 정권만 잡으면 요직은 모두 '내 사람'으로 바꾸겠다고 나선다. 야당은 그런 정권에 사생결단 뒷다리 잡기로 맞선다. 타협은 없다. 상대를 밟아야 내가 서고, 적을 쓰러뜨려야 내가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가 상생의 정치로 한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는 이유다. 국민 여망을 외면한 일방적인 지명, 또 국민이 뽑은 최고 통치권자의 통치철학을 무시한 무조건적인 반대, 이런 줄다리기 속에서 국민은 늘 들러리일 뿐이다.

길이 있긴 하다. 대통령과 정부 여당의 각성, 야당과 시민세력의 합리적 견제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다. 사안에 따라 양보도 하고 기다려 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게 상생의 정치다.

그러자면 당장 '종북'이니 '친일'이니 하는 낙인찍기부터 그만 써 먹어야 한다. 식민지와 분단을 경험한 우리에겐 어차피 함께 해야 할 숙명적인 단어다. 그러기에 나라 일꾼 뽑는 데서 만큼은 그 이상의 가치로 판단하고 싶은 것이 국민의 마음인 것이다.

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따뜻한 마음을 지녔는지, 얼마나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는지, 앞으로 맡을 자리에 대해 어떤 비전과 실천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 등등. 정말 이런 것들로 여야가 다투는 청문회를 한 번이라도 봤으면 싶었다. 그러나 문창극 후보자의 사퇴로 또 다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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