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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In]이맘때면 그가 보고 싶다

정구현·사회부 차장

이맘때면 그가 보고 싶다. 그는 내 사수였다. 신문사에서 사수 선배기자와 졸병 후배기자의 관계는 특별하다. 실망과 존경심이 애증으로 엮인다. 그는 날 가르친다는 이유로 출근하면 욕을 했고, 퇴근하면 엄청난 양의 숙제를 안겼다.

LA경찰국 산하 모든 경찰서 전화번호와 서장 이름을 외우게 했고, 카운티 셰리프국 지부번호도 모조리 암기하게 했다. 뿐인가. 용의자 체포부터 판결까지 형사재판절차를 하룻밤새 리포트로 써서 제출하라 했다. 모르면 "니가 기자냐?"하고 빈정거렸다. 성질도 불 같아서 동료나 선배와의 인간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그를 아는 사람들이 아는 그의 모습이다. 누구나 동전 양면같은 성격이 있다고 한다. 그도 마찬가지다. 다른 면의 그는 겸손했다. 특종기사를 쓰고 칭찬을 들으면 쑥스러워 했다. 항상 머리를 긁적이며 "소 뒷걸음질치다가 쥐 잡았다"고 했다.

눈물도 많았다. 내 결혼식을 친동생이 결혼하는 것처럼 감격스러워했다. 결혼식 뒤풀이 자리에서 술 한잔하고는 "형이 해준 게 없어 미안하다"며 꺼이꺼이 울었다. 그의 축의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았다. 그때 그의 살림살이는 결코 넉넉하지 않았다.



그를 이해하려면 '그날 밤'을 이야기해야 한다. 새벽에 전화가 왔다. "집에 좀 올래?"

전에 없던 말투가 불안해 차를 급히 몰았다. 집은 온통 어질러져있었다. 소파에 잠든 그의 늦둥이 아들을 보면서 둘이서 말없이 술을 마셨다. 그는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어려워했다. 하나씩 꺼낸 아픈 이야기는 안주 없이 마신 양주보다 썼다.

그는 한인 언론 경쟁 신문을 두루 거쳐 주류 신문사로 자리를 옮겼다. 기자로 실력좋았던 그였지만 감원 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투자했던 식당도 망했다. 은행은 집을 압류했다. 쉴새없이 쏟아져나오던 말은 '암'으로 끝났다. 췌장암이다. 이미 늦은 것 같다고도 했다.

모든 일들이 3개월 사이에 벌어졌다. 말을 마친 그나, 말을 들은 나나 뒷말을 잇지 못했다.

"막둥이 학교 졸업하는 건 보고싶어. 딸 손잡고 결혼식 입장도 하고 싶었는데…."

술을 찾으려 냉장고를 열었다가 울컥했다. 말라비틀어진 밑반찬 몇 개와 쉰 김치, 유효기간 지난 우유가 전부였다. 화가 치밀었다.

"이따위로 살래 선배?"

새벽에 그의 집을 나서 차에 타는데 그가 멀리 산너머를 보면서 말했다. "엊그제 저 뒷산에서 불이 났어. 취재하러 가고 싶더라고. 이해가 가니?" 내가 아는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기자였다. 차를 몰고 집에 오다가 차를 세웠다. 통곡했다.

그날 이후 그는 매듭을 풀기에 급했다. "글이 왜 이따위냐"고 질책만 하던 그가 몇 번이고 전화해 "글 좋다"고 칭찬했다. 어쩌면 죽을 준비를 했는지도 모른다. 몇 개월 뒤 그는 정말 세상을 떴다.

죽기 전 그는 '나 죽었다는 기사를 쓰지 말라'는 글을 남겼다. 그 '일방적인 약속'을 4년이 지나 어기려고 한다. 평생 기자이고 싶었던 그를 회상하는 것이 기자인 내게 절실하다는 '일방적인 이유'에서다.

언제부턴가 글을 쓸 때보다 지면을 메울 때가 더 많다.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의 잘못을 파고들지 않고, 만만한 취재원들만 가지고 논다. 상대와 뜻이 맞지 않는다고 욕만 하고 납득시키려고는 노력하지 않는다. 후배들에게 "내가 도와줄까"는 말보다 "네가 취재해라"는 말을 더 자주한다.

곧 기일이다. 내 사수는 2010년 7월26일 푹푹 찌던 날 아침에 삶을 마감했다. 그는 김경원 기자다.

이맘때면 그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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