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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사람이 고향이다

이종호/논설위원

먼저 한시부터 한 수 감상해 보자. 중국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고향집 매화'라는 유명한 시다.

'君自故鄕來(군자고향래, 그대가 고향에서 왔다니) 應知故鄕事(응지고향사, 고향 소식 잘 알겠군요) 來日綺窓前(내일기창전, 떠나오던 날 우리 집 비단창문 앞) 寒梅着花未(한매착화미, 추위 겪던 매화는 아직 안 피었던가요?')

객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 고향 소식을 묻는 장면을 이렇게 절창으로 읊었다. 고향을 떠난 이에게는 고향의 꽃소식조차도 애틋한 그리움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웬 고향 타령이냐고? 엊그제 월드컵 독일과의 결승전, 아르헨티나 출신 LA한인 200여명이 함께 모여 '제2의 조국'을 뜨겁게 응원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갑자기 뭉클한 생각이 들어서이다. 무엇이 그들을 함께 모이게 하고 흥분시킨 것일까. 답은 '고향'이다.



사람들은 고향이라는 말에는 모두 약해진다. 고향 친구, 고향 음식, 고향 역, 고향 집, 고향 풍경…. 고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의 빗장이 풀리고 무장은 해제된다. 고향은 그리움이다. 산이 그립고, 바다가 그립고, 사람이 그립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고향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기 시작했다. 이민 1세대들이 벼르고 별러 한국을 가고 고향을 방문해 보지만 모든 것이 달라진 고향 풍경 앞에 오히려 낙담만 하고 돌아섰다는 얘기는 얼마나 많은가. 나 역시 재작년 10여년 만에 고향 부산을 방문했지만 더 이상 내가 그리던 그런 고향이 아니었음을 발견하고 크게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의 고향은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타향에서 일군 제2의 고향은 어떨까. 대다수의 이민자가 그렇듯 태평양 건너 처음 발 디딘 곳이 제2의 고향이 되곤 한다. 나에겐 뉴욕이 그런 곳이다. 그곳에서 6년을 살았다. 그러면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문화, 전혀 다른 경험들을 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더불어 살기 힘든 곳이 미국이라는 것도 그곳에서 터득했다. 거기에다 한적하고 평화롭던 롱아일랜드 바닷가, 낡고 지저분했지만 정겨웠던 지하철, 황홀한 단풍, 눈부신 겨울 설경, 아침이면 아이를 태워가던 노란 스쿨버스 등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지난 연휴 동안 모처럼 뉴욕을 다녀왔다. 실로 8년 만의 '고향방문'이었다. 가는 첫날은 비가 왔다. 반가웠다. 가물대로 가문 캘리포니아, 여름 내내 비 한 방울 보지 못하는 건조한 곳에 살던 내게 여름은 원래 비의 계절이었음을 깨닫게 해 준 단비였다. 눈부시게 푸른 녹음도 봤다. 남가주의 희끄무레한 초록 나뭇잎들과는 차원이 다른 싱그러움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그때 그 시절, 그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부지런히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사진을 찍었다. 그럼에도 만나보고 싶은 사람 10분의 1도 다 못 만났다. 미안하고 아쉬웠다.

LA로 돌아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고향은 사람이구나. 내가 만나보고 싶은 사람,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 그곳이 바로 고향이구나.

이민자들은 현실적으로 돌아갈 고향이 없다. 돌아간다 한들 옛날의 그런 고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 지금 사는 곳에 마음 붙이고 사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최선이다.

'타향도 정이 들면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말을 했던가, 바보처럼 바보처럼….' 1972년 가수 김상진이 부른 '고향이 좋아'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이 노래의 가사는 이제 바뀌어야 한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이민자들에겐 정붙여 사는 타향이야말로 진짜 고향이기 때문이다. 타향도 정이 들면 정말 고향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이곳에서 만나고 있는 사람들 역시 언젠가는 그리워하게 될 고향사람임을 생각하니 갑자기 그들이 너무 소중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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