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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업] 한국으로 살러 간 아들

수잔 정/소아정신과 전문의

내 아들은 1년 전에 한국으로 살러 나갔다. 4년간의 준비 끝에 대학 졸업 후 8년 동안 일해 오던 회사를 그만 뒀다.

30세인 아들은 사직 후 용감하게 배낭여행을 떠났다. 유럽 국가들을 샅샅이 거쳐가면서 유명한 성당과 조각, 건축물의 사진을 블로그를 통해 보내왔다. 마치 나도 같이 여행을 다니는 느낌이었다. 전쟁이 그치지 않는 중동에서도 각 고장에서 만난 젊은이들과 밤새도록 파티를 즐기는 듯 했다. 이스라엘에 가서는 키부츠에 들어가 현지인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스라엘 젊은이들 태권도 실력은 대단해요. " 7세에 태권도를 시작한 아들은 14세에 검은 띠 1단을 땄다. 1년 후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더욱 열심히 매달리더니 4년 후에는 2단이 됐다.

인도에 가서는 아크람 요가학교에 입학해 각 짐승의 모습을 자신의 몸으로 표현한 사진을 보내왔다. 음식이 맞지 않아 줄곧 설사를 하면서도 3주를 버티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참을 수밖에…. 태국에서는 바닷가에서 피서를 하는 대신에 천주교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영어와 태권도를 가르쳤는데 어찌나 어린 아이들이 좋아하고 따르는지 그냥 올 수 없었다며, 고아원 앞뜰에 망고나무를 많이 심어 주었다. 자신의 블로그를 읽는 사람들에게 기금을 보내 달라는 요청과 함께. 몇년 후 망고 열매가 열리면 아이들의 등록금이 될 테니까.

동남아에선 가장 가난하고 개발이 안된 라오스를 아들은 좋아했다. 그래서 불교 스님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가서 2~3주를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놀았다. 일본과 한국을 거쳐서 들어간 중국 소림사에서는 3개월을 묵으며 무술 연마를 했다. 그리고 13개월간의 대장정을 마쳤다.



한국에서 지낸 2주 동안, 아들은 아버지의 친척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두껍게 장정돼 있는 정씨 가문의 족보를 대하게 됐다. 워싱턴주에 위치한 메디간 육군병원에서 내가 군의관으로 근무할 때 태어났고 두살 때 이사왔던 LA에서 대학 진학 때까지 자란 아들이었다. 열다섯 살 되던 해에 한글 여름학교에 가느라 서울에 갔다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돌아온 후 15년만에 다시 귀향을 한 셈이다. 그리고 나서 아들은 한국에 가서 살겠다는 결심을 한 모양이다. 뿌리를 찾으려는지 아니면 한국인 부모를 이해하고 싶어서인지.

워낙 말이 적은 아들의 결심을 나는 무조건 환영했다. 자신이 늘 꿈꾸던 컴퓨터 관련 컨설팅 회사를 설립하겠다면서, 본인의 이름자인 학(Crane)과 용(Dragon)의 상징을 넣은 회사 로고도 이미 만들었다.

지난 5월 한국에 나가서 만나본 아들은 짧게 깎은 머리와 단정한 옷차림으로 나를 안심시켰다. 1년 반 동안 한국에 살면서 요리 실력도 늘었단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어 실력은 크게 늘지 않은 듯하다. 점심을 같이 하면서 식당 주인에게 "추운 물 주세요"하니 아주머니가 얼른 알아듣고서 찬물을 가져다 주셨다.

지금 한국에는 아들처럼 외국 국적을 갖고 살고 있는 사람이 4만여명이나 된단다. 한국이 이들 젊은이들의 동경의 땅이 되었다니 으쓱한 기분이다. 내가 27세에 미국에 와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 과정을 나의 아들은 서른이 넘어서 부모의 땅, 한국에서 밟아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아들이 고맙다. 어쩐지 문화를 공유하며 더 친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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