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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오지여행가 한비야는 잊어주시길

한비야/유엔 자문위원

아직까지 나를 배낭 메고 혼자서 세계일주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다면, 오지여행가 한비야는 잊어주기 바란다. 2000년, 6년에 걸친 국내외 오지여행을 끝내고 2001년부터 구호 전문가로 완전히 변신했기 때문이다. 여행보다 구호활동 기간이 훨씬 길건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전 세계를 다녀보니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라고 묻기에 칼럼 연재를 시작하면서 미리 당부드리는 거다.

 하지만 오지여행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렇게 견딜 수 없이 뜨거운 마음으로 하고 있는 구호 일을 만나지 못했을 거다. 오지, 특히 아프리카 오지를 다니면서 알게 되었다. 5초마다 아이 한 명이 굶주림 때문에 죽는다는 걸, 단돈 천원이면 살 수 있는 약이 없어서 아까운 생명이 꺼져간다는 걸, 더러운 물 때문에 눈이 멀고 생살을 뚫고 나오는 기생충에 시달린다는 걸. 직접 본 현장은 책이나 텔레비전에서 읽고 본 것보다 훨씬 놀랍고 고통스러웠다. 분할 만큼 안타까웠고 할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런 사정을 알리기만 하면 정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반드시 도와줄 텐데… 내 전공인 국제 홍보를 활용해서 이런 얘기를 전할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아프리카 여행 내내 계속되던 이 생각은 아프가니스탄 북부 헤라트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1996년 초겨울의 헤라트는 무시무시했다. 점령군이 된 탈레반 반군들이 중무장을 하고 험악한 얼굴로 거리를 활보하며 공포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렇게 위험한 줄 알았으면 당연히 가지 않았을 거다. 그땐 여행 금지 국가 지정제도도 없었고, 이 나라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무식해서 용감하게' 들어갔던 거다. 그러나 헤라트에 오자마자 상황 파악을 하고는 매일매일 위경련이 날 정도로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중앙아시아의 진주'라는 헤라트를 조심조심 구경하다 우연히 자생 난민촌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네에 들어서자 세상 여느 아이들처럼 떼 지어 신나게 뛰어놀던 20명 정도의 아이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나를 둘러쌌다. 얼마나 놀랐겠는가? 부르카로 온몸을 꽁꽁 가리기는커녕 얼굴을 다 드러내고 다니질 않나, 그 얼굴이 동글납작하질 않나, 게다가 등에 커다란 배낭까지. 머루같이 까만 눈을 반짝이며 날 '구경하는' 아이들이 너무 귀여워서 배낭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아이들과 놀았다.

 남자아이들에게는 태권도 기본 동작을 보여주고 여자아이들에게는 삼색 볼펜으로 손에 시계나 꽃반지를 그려주니 낄낄, 깔깔, 하하, 호호, 좋아서 죽는다. 그러나 내가 난민촌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옆에서 싱글벙글 좋아하던 어른들의 얼굴이 굳어져갔다. 외국인과 무슨 내통이냐고 탈레반들에게 트집을 잡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곤란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아이들에게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아까 손가락에 꽃반지를 그려준 꼬마 여자아이가 수줍게 빵을 건넸다. 지뢰를 밟아 왼쪽 다리가 없는 아이였다. 난민촌의 빵, 언제 다시 생길지 모르는 그 귀한 식량을 잠깐 놀아준 내게 주고 싶은 거였다. 받아야 하나, 잠시 망설이는 동안 아이들도 숨죽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활짝 웃으며 그 빵을 덥석 베어 물었더니, 글쎄 아이들이 일제히 와, 하고 환호성을 지르더니 손뼉을 치고 어깨까지 들썩이며 좋아하는 게 아닌가. 그날 결심했다. 이 여행이 끝나면 이 난민 아이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할 수 있는 일은 다하겠다고, 내가 가진 어떤 것도 아끼지 않겠다고.

 간절히 원하면 우주 만물이 힘을 합해 돕는다던가. 세계일주를 끝내고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신문, 방송 인터뷰마다 국제 구호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드디어 국제구호기구 월드비전으로부터 홍보팀장 겸 긴급구호팀장 제안이 들어왔다. 2001년 10월 7일 첫 출근 날,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터졌다. 내 첫 번째 파견근무지는 놀랍게도 아프가니스탄 헤라트였다.

 그렇게 시작해 어느새 14년. 지금도 1년 중 6개월은 한국에서, 6개월은 구호 현장에서 일한다. 재작년에는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로 유명해진 남수단에, 작년에는 서아프리카 말리에서 난민 구호를 했고 올해는 다음주부터 필리핀 하이옌 태풍의 재난 복구팀에 합류할 예정이다.

"긴급구호가 뭐 하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한마디로 긴급구호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일이다. 병원으로 보면 응급실 의사라고 할까? 긴급구호팀도 사람 살리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 구체적으로는 수만 명 단위의 재난민들에게 물, 식량, 보건·의료, 피난처를 지원하고 동시에 그들을 반군 등 위험세력으로부터 보호한다. 요즘에는 인도적 지원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긴급구호는 이 인도적 지원의 일부분이다.

 앞으로 이 칼럼에 구호 현장에서 보고 들은 일, 만난 사람들, 그곳에서 느낀 이런저런 생각을 편안하고도 흥미진진하게 풀어놓을 생각이다.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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