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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김영옥]〈8> 어머니②

어린 영옥 엄히 가르치려 한 어머니의 호된 매질에도
자신이 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끝까지 거짓 인정하지 않아
자기가 옳다고 믿지 않으면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는 성격


가족의 저녁 식탁에서도 정치가 가장 중요한 화제였기 때문에 영옥의 형제들은 짙은 정치색 속에 자라났다.

"아무래도 생전에 조선이 해방될 것 같지 않다. 그러니 너희도 조선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고 결국 미국시민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인들처럼 먹고 말하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버지는 틈날 때마다 강조했고 이를 위해 집에서도 하루에 한 번은 꼭 양식을 먹도록 했다.



아버지가 그런 식이니 가게 운영은 자연히 어머니의 몫이었다. 지금이나 그 때나 편의점은 영업시간이 길고 노는 날도 없었다.

손님들이 출근길에도 들렀기 때문에 아침 6시면 어김없이 문을 열어 밤 10시가 지나야 문을 닫았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일요일에도 가게를 열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은 가게에 남고 남편과 자식들만 교회로 보냈다.

1000명 안팎에 불과하던 당시 재미동포들의 이민생활은 크게 세 가지가 핵심이었다. 생업 독립운동 교회였다. 특히 독립운동과 교회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였는데 노선을 놓고 분열하기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다니는 교회만 보면 어떤 노선인지 알 수 있었다.

대한인기독교회에 다니면 이승만을 지지하는 동지회원이고 로벗슨한인연합감리교회에 다니면 안창호를 지지하는 국민회원이나 흥사단원이고 하는 식이었다.

독립운동 노선이 달랐던 이승만과 안창호도 심한 갈등을 빚었다. 안창호가 세상을 떠나자 이승만은 안창호의 유족에게 직접 조전을 보내는 대신 영옥의 아버지에게 전보를 쳐서 자기 대신 문상을 가달라고 부탁해 아버지가 이승만의 조객으로 찾아갔을 정도였다.

영옥의 가족과 안창호의 가족은 몇 집 건너 이웃이었다. 영옥의 아버지는 안창호와도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이승만을 더 적극적으로 지지해 이승만이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할 때면 영옥의 집에 머물기도 했고 자식이 없던 이승만 부부가 영옥의 여동생을 수양딸로 삼으려 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가족들이 한 번 교회에 가면 아버지가 예배 후에도 친구들과 모여 시간가는 줄 모르고 정치 얘기를 했기 때문에 모두 해가 떨어져야 돌아왔다. 가족 중에 가장 경건한 신자인 어머니만 교회에 가지 못했으나 어머니는 매일 새벽 눈을 뜨거나 매일 밤 잠들기 전이면 어김없이 30분씩 기도를 했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에 서너 번은 반드시 경건하게 기도를 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일하는 모습과 기도하는 모습부터 떠오를 정도로 어머니는 근면하고 독실했다.

유학의 꿈을 접자 억척스런 비즈니스우먼이면서 헌신적 아내로 변신한 어머니는 감을 몹시 좋아해 땡감이라도 시중에 나오면 반드시 너덧 개씩 사 가지고 와 볕이 잘 드는 창틀을 골라 가지런히 놔두고 익혔다.

가족이 한 개씩이라도 먹으려면 여덟 개는 사와야 했지만 돈을 아끼느라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남가주에서는 감이 잘 자라지 않아 감은 항상 중가주에서 왔다.

감이 아주 맛있는 과일이라는 소리를 듣고 처음에 영옥은 창틀에 놓여 있는 아직 익지도 않은 감을 어머니 몰래 먹다가 야단을 맞기도 했다. 아직 초록빛을 머금은 감이 햇볕에 익어 주황빛으로 바뀌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어린 영옥에게 참기 힘든 즐거움이었다.

주황색으로 바뀐 감을 두고 둘러앉아 떠들고 웃으며 나눠먹던 순간은 영옥의 가족에게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고 감이 있는 날이면 학교에서 돌아오는 영옥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영옥이 12살 소년으로 자라났을 무렵이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영옥이 하지 않은 일이 틀림없이 영옥의 짓이라 생각하고는 안 했다고 부인하는 영옥을 단단히 가르치려 마음먹었다.

밖으로 나가 굵은 회초리 세 개를 꺾어온 어머니는 영옥에게 종아리를 걷고 목침 위에 올라서게 했다. 한 대 두 대 세 대…. 후려치던 회초리가 부러졌다.

"어째서 잘못했다고 다신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는 게냐?"

"전 하지 않았어요!"

영옥은 목침 위로 올라설 때부터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 거짓으로 인정하고 잘못을 빌지도 않고 울지도 않겠다고 처음부터 마음먹었다. 두 번째 회초리가 부르튼 종아리를 계속해서 내리쳤다. 처음에는 위압적이던 어머니의 어투가 차츰 애원하듯 바뀌어갔다.

"그냥 잘못했다고 해라. 다신 안 하겠다고."

"아뇨 전 하지 않았어요."

영옥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계속해서 매를 내리쳤다. 영옥의 종아리에선 피가 나기 시작했다. 결국 회초리 세 개가 모두 부러지자 어머니는 피가 흐르는 영옥의 종아리를 감싸 안고 울기 시작했다.

"너는 참으로 고집이 세구나. 다른 아이들은 회초리를 들기만 해도 벌써 잘못했다고 울며 비는데…. 너는 종아리에 피가 흐르는데도 그냥 맞고 서있구나. 팔이 아파 더 이상 회초리를 들 수가 없다.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구나. 내가 졌다. 네게 회초리를 드는 것은 이게 마지막이다. 앞으로 다시는 때리지 않겠다. 너는 앞으로 크면 큰 죄를 짓고 감옥에 가든가 아니면 아주 위대한 인물이 될 거다."

이 날 집에는 어머니와 영옥 단 둘 뿐이었고 이 일에 대해선 일체 말하지 않았으므로 어머니와 영옥 둘만이 아는 일이었다. 아버지에게도 동생들에게도 일체 말하지 않았는데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누나만 이 일을 알게 됐다.

영옥이 자라나면서 부모에 이어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이 누나인 윌라였다. 아버지는 첫 딸을 얻자 이름을 윌라라고 지었다. '나성의 달'이란 의미인 월나(月羅)의 발음과 가장 가까운 서양식 이름이었다. 나성(羅城)은 로스앤젤레스를 일컫는 한자 이름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주 총명했던 누나는 나중에 세계 최고의 예술의상 디자이너가 됐다. 오늘날까지도 '세계 무대예술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유일한 한국인이자 토니상을 받은 유일한 한국인이다.

영화에서 아카데미상이나 언론에서 퓰리처상이 누리는 권위를 뮤지컬 분야에서 누리는 토니상은 사실 뮤지컬 관계자라면 후보지명만 되도 이력서에 쓰는 상으로 누나는 다섯 번이나 후보로 지명됐고 두 번이나 수상자가 됐다. 누나는 현재 97세로 뉴욕에 생존해 있는 브로드웨이의 여왕이다.

대공황이 휩쓸고 지나간 직후인 1930년대에는 미국에도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윌라도 20세를 전후해 사회주의에 깊이 빠져 있었다. 누나는 끔찍이 아끼는 동생 영옥에게 사회주의의 장점을 이야기하며 영옥을 설득하려 했다.

그렇지만 영옥은 어린 나이에도 자기가 옳다고 믿지 않으면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영옥은 누나나 누나의 친구들이 논리정연하게 펼치는 사회주의 찬양론을 들으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서를 비롯해 사회주의 책들을 폭넓게 읽었다.

그러다 보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이에 비해 상당히 체계도 잡히고 깊이도 있는 견해를 갖게 됐는데 영옥이 내린 결론은 누나와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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