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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참전용사 도움 겨우 취직했죠"

사진으로 보는 이민사
1968년 전화회사 입사 이재학씨

어린 자녀 있다는 이유로
아파트 렌트 번번이 퇴짜
한인마켓 장볼때 행복감


'아시안'보다는 '동양인'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했던 60년대 말과 70년대 초 LA한인타운에 살던 초창기 한인 이민자들은 미국인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대한민국 6.25 참전유공자회 미서부지회 육군 부회장인 이재학(79.글렌데일)씨도 그 중 한 명이다.

캐나다 기술이민직을 거쳐 1968년 LA로 재이주한 이씨는 군대 시절 통신병 경력을 살려 엔지니어로 취직을 시도했다.

당시 이씨가 찾아간 곳은 샌타모니카에 있는 전화회사 'GTE(버라이존 전신)'. 하지만 필기시험을 본 그의 점수는 69점. 인터뷰를 하려면 72점을 받아야 했기에 탈락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한국전 참전용사였던 인사담당 부사장의 도움으로 인터뷰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당시 회사 부사장이 총 7명이었는데 사상 처음으로 아시안 지원자 때문에 부사장단 회의까지 열었다고 합니다. 결국 각 부사장과 일대일 인터뷰를 하고 나서야 합격해 포모나 지사의 엔지니어로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그 참전용사가 아니었다면 취직은 힘들었을 겁니다."

취업 뿐만아니라 집을 구하는 일도 힘들었다. 어린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아파트마다 렌트 요청을 번번이 퇴짜맞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씨는 친구에게 자금을 빌려 회사 근처인 샌타모니카에 있는 단독주택을 구입했다. 이씨는 "방 2개의 작은 단독주택이었지만 집 없는 설움이 사라져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GTE에서 그는 장거리 전화 기계의 성능을 점검하고 분석해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는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밤을 새기가 일쑤였다.

"한국에서는 보지도 못했던 기계를 다뤄야 했기에 매뉴얼을 엄청나게 공부했습니다. 기술자들에게 영어 못한다는 무시도 당하기 싫었습니다."

그는 이미 1957년 한국군에서 선발해 뉴저지 미 육군 통신학교에서 일년동안 공부한 유학파다. 주의회를 방문하는 상관의 영어 연설문을 서툴지만 작성했을 정도였다.

이씨는 "1973년 이후 한국 사람들이 점차 늘면서 올림픽과 하버드에 올림픽마켓이 문을 여는 등 지금의 한인타운이 조금씩 형성됐다"며 "중국마켓이나 일본마켓이 아닌 한인 마켓에서 두부와 콩나물을 샀던 기쁨은 아마 요즘 한인들은 모를 것"이라고 그때를 회상했다.

장연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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